Page 78 - 대한사랑 11월호
P. 78
를 받아들인 공민왕은 곧 쌍성총관부를 공격 한 관계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계
하여 그 지역을 되찾았다. 이자춘이 자신의 병 는 곧 무인으로서의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드
력을 이끌고 고려의 공격에 합류했던 것은 물 러내었다. 1364년 동북면병마사로 임명된 이
론이다. 이자춘은 그 공로로 종3품의 사복경(司 성계는 옛 쌍성총관부 땅을 다시 차지하기 위
僕卿)이라는 직책을 받고 개경으로 이거하였다. 해 침입한 몽골의 나하추 군대를 격파하여 명
몽골 이름 울루스부카 이자춘은 외국인의 신 성을 떨쳤다. 그리고 1370년에는 1만 5,000명
분에서 고려인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이자춘 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가 원나라의
은 계속해서 높은 관직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남은 무리들이 웅거하고 있던 동녕부의 본거지
‘삭방 도만호 겸 병마사’는 쌍성총관부의 군사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이성계의 요동성 공략은
업무를 총괄하는 무관직이었다. 이자춘의 아들 중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을 정도이니 고려
이성계는 당시 20대 초반이었는데, 부친이 병 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10년 뒤
마사 직책을 받자 그 충성을 보증하기 위한 질 인 1380년에는 고려를 침입한 왜구를 상대로
자로 개경에 보내졌다. ‘기인(其人)’이라고도 하 남원의 운봉에서 대승을 거두어(황산대첩) 국가
는 질자(質子)는 감옥에서 생활하는 인질이 아니 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원나라의 직할령인 쌍
다. 높은 신분의 자제들인 이들은 왕궁에서 생 성총관부 출신 이성계가 고려의 영웅으로 부상
활하였다. 젊은 이성계는 기인 시절 개경에서 하고 결국 조선을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무장
공민왕과 친분을 쌓았다. 이자춘이 1361년 죽 으로서의 이러한 공적이 뒷받침되었던 것은 물
자, 그 직위는 장남 이원계가 아니라 차남 이성 론이다.
계가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공민왕과의 친밀
황산대첩도 ⓒ경기전
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