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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대고려를 위하여 고뇌한 장수왕

장수왕(長壽王, 재위 412~491)은 고려(고구려)의 제20대 국왕으로,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의 아들이다. 그는 광개토왕 영락(永樂) 19(409)년 16세의 나이에 태자가 되었고, 영락 22(412)년 광개토왕이 붕어하자 국왕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이룩한 제국을 물려받아 힘겹게 수성하며 고려의 전성기 100년을 이끌었다. 광개토왕의 업적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도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록하고 나라를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장수왕은 아버지가 이룩한 천하를 완성하기 위해 재위 16(427)년 국내성에서 남쪽의 평양(平穰)으로 천도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궁극적 이유는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경영하여 고려의 천하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평양은 고구려의 중심이자 천하의 중심이었다.

이 평양 천도는 광개토왕 때부터 추진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영락 3(393)년 광개토왕이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세우고, 영락 19(409)년에는 평양 주민 이주를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개토왕비에도 영락 9(399)년 평양을 순행하고, 영락 14(404)년 황해도에 침입하여 평양까지 쳐올라온 왜군(倭軍)을 무찔렀다고 나와 있다. 특히 393년 평양 9사 창건은 이후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이 금마 익산에 많은 절을 지어 불교를 일으키고 차후 천도하려 한 사실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평양에 큰 관심을 가졌고, 차후 천도도 하고자 했다. 하지만 412년에 급서하면서 이루지 못한 것을 아들 장수왕이 이루었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왕비에는 평양이 비중 있게 등장하는데, 이는 광개토왕비가 고구려 천하의 형성을 선포하여 광개토왕이 이루지 못한 평양 천도의 당위성을 명기한 것임을 알려 준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기 직전에 먼저 나라 이름을 고구려에서 고려(高麗)로 바꾸었다. 중국의 송서(宋書)라는 책에는, 420년에는 송나라에서 고구려라고 부르다가, 423년부터는 고려국(高麗國)이라 불렀다고 나온다. 그러면 고구려에서 고려로의 국호 개칭은 420~423년 사이가 된다. 장수왕 때 천하의 완성을 의미하는 고려 선포와 평양 천도가 함께 이루어진 것은 광개토왕 때의 비약적 발전과 문화적 성숙을 기념하여 새로운 고구려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이처럼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위업을 이어받아 신성한 왕통(王統)으로 보장되는 절대 왕권을 확립하고 천하를 완성하여 국제 사회에서 고려의 자주적 위상을 드높이고자 했다. 실제로 고려의 국제적 위상이 가장 높았던 시기가 바로 장수왕 때이다. 장수왕이 중국과 능수능란한 외교를 벌여 국력을 과시함으로써, 고려는 북쪽의 유연(柔然), 서쪽의 북위(北魏), 남쪽의 남조와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의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수왕은 중국으로부터 천하를 지키며 만백성이 평화를 즐기는 태평성대를 이끌 수 있었다. 당연히 고려의 백성들은 전란이 많았던 광개토왕 때보다 전란이 적은 장수왕 때를 태평성대로 노래하였을 것이다. 이는, ‘평화를 위하여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철저히 실천한 광개토왕의 창업(創業)과, 그의 뜻을 받들어 태평성대를 이끈 장수왕의 수성(守城)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고려가 최전성기를 누리며 대제국(大帝國)으로 군림한 때는 바로 장수왕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대하고 평화롭기만 한 것 같았던 장수왕의 치세는 또 다른 고난의 연속이었다. 국토 수호의 어려움, 왕권 강화로 인한 귀족과의 다툼, 국내성 세력과 평양 세력의 대립, 북방 세력의 발흥, 북위의 북중국 통일, 아우의 나라 백제와 신라의 배신 등 보통 아니게 골치 아픈 시대였다.

 

우선 국내성 세력과 평양 세력의 대립은 광개토왕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 때라고 내부의 혼란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개토왕은 평양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자주 행차하며 절도 짓고 그곳에서 몸소 적도 무찌르며 천도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에 반발하는 국내성 세력과 호응하는 평양 세력의 대립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광개토왕은 이런 내부 혼란을 국외 정복 사업으로 무마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장수왕은 끝끝내 국내성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천도를 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귀족뿐 아니라 왕족들까지 들고일어났다. 바로 장수왕의 왕권 강화와 태자 책봉에 대한 반발이었다. 장수왕은 자신을 포함한 역대 고구려왕을 하늘의 자손인 천손(天孫)으로 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왕의 권위를 신성화하고자 했다. 절대 왕권의 수립은 곧 귀족 세력의 약화를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에 따른 귀족들의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장수왕과 같은 시대의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은 고려를 쳐 달라는 국서를 북위에 보냈는데, 그 국서에는 장수왕의 죄로 고려 국내가 어육지경(魚肉之境)이 되고 대신과 귀족 들이 뿔뿔이 흩어져 심히 어지럽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이 무렵 장수왕이 절대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장수왕의 피의 숙청으로 고려의 귀족들은 흩어지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해 갔다.

그런데 망명한 고려인들 중에는 귀족뿐 아니라 왕족인 고씨들도 있었다. 이는 장수왕의 후계자 선정 작업에 반발하다가 왕이 압력을 가하자 타국에 망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후계자 선정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장수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태자이고, 둘째는 왕자 조다(助多)이다. 그런데 태자와 왕자가 아버지 장수왕보다 일찍 죽은 탓에 왕자 조다의 아들인 나운(羅雲)을 태손으로 책봉하였다. 나운은 훗날 장수왕의 뒤를 이어 제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이 된다. 태자와 왕자는 왜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을까? 아버지가 무려 98세의 장수를 누린 탓에 아들들의 수명이 못 따라가 먼저 갔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새로 나온 설이 바로, 장수왕의 왕권 강화에 반발한 귀족들이 태자와 왕자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당시 장수왕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을 보면, 이 설은 설득력이 충분하다.

태자와 왕자가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고려 국내에 거대한 파장을 몰고 왔을 것이다. 고려의 최전성기라고 불리는 장수왕 시대에도 장차 용상(龍床)을 물려받을 왕자들이 살해당할 정도로 심각한 내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수왕은 오히려 죽은 왕자의 아들인 나운을 후계자, 즉 태손(太孫)으로 선정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이에 팔팔하고 혈기왕성하던 젊은 왕족들이 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나라를 떠났던 것이다.

 

이밖에 북위의 북중국 통일(439)과 물길(勿吉, 말갈), 유연 등 북방 세력의 발흥으로 동아시아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북위, 유연, 남조, 고려가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4강 체제 속에서 장수왕은 국제 정세를 잘 살피며 가장 강대한 북위와 동맹하는 동시에 남조, 유연과 연결하여 북위를 견제하는 세련된 외교 정책을 구사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징검다리 외교이다. 시대상을 정확히 읽은 능란한 외교적 대처로 장수왕은 아버지가 물려준 나라를 지키며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수왕의 과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의 시대 최악의 난제는 바로 백제와 신라의 배신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아버지 광개토왕에게 평정되어 고구려의 천하 속에서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자 두 나라는 배신을 꾀했다. 평양 천도는 남하 정책이 아닌 천하 경영을 목적으로 했지만, 이를 남하 정책으로 오인한 백제와 신라는 마침내 433년 고려에 대항하기 위해 나 · 제 동맹을 맺었다. 극도의 긴장감이 한반도에서 조성된 것이다.

나 · 제 동맹 이후에도 백제와 신라는 여전히 고려에 공물을 바치며 힘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450년, 신라 땅에서 사냥하던 고려 무장이 신라인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분노한 장수왕은 신라의 눌지 마립간에게 어떻게 우호를 깰 수 있냐고 항의하며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지만, 눌지 마립간이 정중하게 사과함으로써 사건이 매듭지어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고려와 신라의 사이가 벌어짐으로써 신라는 마침내 고려에 조공을 끊었고, 이때 백제도 고려에 조공을 끊었다. 백제와 신라가 본격적으로 독립을 꾀하자 장수왕은 마침내 454년 신라에 전면 공격을 개시했고, 455년에는 백제를 공격했다. 그러나 고려가 백제를 침입하면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고, 신라를 침입하면 백제가 신라를 구원하였으므로 고려는 쉽사리 두 나라를 깨뜨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475년 장수왕이 백제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참수하면서 한반도의 형세가 기울게 된다. 개로왕 참수는 백제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다. 고려의 천하에서 공생하지 않고 이탈한다면 또 한 번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 사건으로 백제는 오늘날의 충남 공주인 곰나루(웅진)로 천도하여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다만 장수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 · 제 동맹을 유지하며 고려에 저항하였다.

백제가 끈질기게 항거하자 고려는 먼저 신라를 정복하고 그곳을 전초 기지로 삼아 백제를 완전히 초토화하려는 야망으로 481년 말갈과 연합하여 대대적으로 신라를 정벌했다. 고려는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호명성(狐鳴城)을 비롯한 7개 성을 차지하고 수도 금성(金城)을 함락시키고자 뱃길을 통해 미질부(彌秩夫, 경북 흥해)로 진격했지만 백제 · 신라 · 가야 동맹군이 나타나 강력히 대항하는 바람에 강릉의 이천(泥川) 서쪽까지 쫓겨 병사 천여 명의 목을 내어주고 말았다. 이로써 장수왕은 백제와 신라를 통일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이후 고려는 백제, 신라와의 지루한 소모전에 힘을 쏟기보다는 조선의 옛 땅을 되찾는 다물(多勿) 사업에 주력하여 두 나라를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장수왕의 시대는 영광의 시대이자 고난의 시대였다. 장수왕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가꾸고 지켜 낸 인물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고구려 시대, 이른바 팍스 코리아나(Pax Coreana)를 이룩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했던 군주였다. 비록, 백제와 신라를 통일하여 천하를 재건하지는 못했지만, 두 나라와 경쟁하면서 자연히 삼한(三韓) 백성들 사이에 동질성을 심어 주었고, 무엇보다 시대에 알맞은 정치를 베풀어 대제국 고려를 창업했다. 고려의 전성기는 장장 140년에 달했다. 전 세계에 고려를 능가하는 오랜 전성기를 누린 나라가 단 하나도 없다. 세계 제국이라 불리는 로마가 5현제 때 86년으로 90년을 못 넘었고, 대영 제국(大英帝國)도 제국주의 시절 99년으로 100년을 못 넘었다. 장수왕과 그의 거룩한 업적이 있었기에 고려는 광개토왕부터 안장왕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유례 없는 140년의 장대한 전성시대를 누리며 더 나아가 삼한의 맏형이자 한민족사의 중심축으로 당당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

 

- 작성자 장수왕(mailedkni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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