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대한사랑 15호(2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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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방 민족들을 달래 보았지만, 더 요구를 하거                    으로 본다.

            나 무력까지 동원하여 위협을 하자 송도 이를                      그러나 송에서 만든 천하사상은 곧바로 몽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은 현실을 받아들                     골에서 활용되었다. 몽골이 나라 이름을 세상

            이고 도망을 다니면서 정신승리를 위한 방안                      의 으뜸이라는 ‘원(元)’으로 바꾸자, 싫든 좋든

            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 방법은 국내적인 틀                    이 틀에서 관리를 해야 했는데, 이런 생각은 현
            인 유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송의 황                   재 중국의 동북 3성도 그들의 역사라는 인식

            제는 하늘의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하늘이 되                     을 갖게 하였다. 원의 동령로(현재 중국 요녕성 요
            어야 하는 것이었고, 이 하늘은 하늘아래 모든                    양지역)는 원래 고려의 땅이었는데, 고려의 반역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야 했던                     자들이 자비령 서쪽의 땅을 원에 바치면서 원

            것이다. 그래야 일시적으로는 북방 민족들에게                     의 땅이 되었다. 송을 점령해 땅을 차지하고 동
            굴욕을 당하였지만, 굴욕을 준 북방 민족들 역                    시에 원이 가지고 있던 북방 민족들의 하늘 존

            시 하늘 아래 것들이기에 송황제의 영향 아래                     중 사상과 송의 성리학이 맞아 떨어지면서 원
            에 있다는 논리였다. 기가막힌 정신승리였다.                     의 모든 땅에는 원의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사

            이런 그들의 생각은 머지않아 몽골의 공격을                      대주의가 퍼지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기자

            받고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그들의 생각은                     가 죽고 천여 년이나 지난 후 쓰여진 믿기 어려
            크나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결국 그들이 멸                    운 책에서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 한 줄

            시하던 북방민족의 황제로부터 지배를 받기 시                     로 한국 역사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곳이 기자

            작하자 이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                     로 덮이게 되었다. 이런 기록을 현실 정치에서
            생각하며 ‘한(漢)’중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그대로 받아들인 고려 사람은 아마도 안향, 이

                                                          2)
            고자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서한이 일어난 현                    곡  과 함께 당대에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을
            재 강소성 일대를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일 것                     것이다.







             2)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중부(仲父), 호는 가정(稼亭)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그는 1317년 고려에서 과거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합
               격하였고,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원나라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었다. 그는
               잠시 고려로 귀국하였으나 그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였다. 다시 고려로 돌아와 한산군(한산군)에 임명되었
               다.
                 그는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호는 문효
               (文孝)이다. 이곡의 아들이 이색인데 이색은 그의 아버지가 원에서 관리를 할 때 잠시 대도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고려 성
               리학의 시조가 되었고, 그의 문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정도전도 이색의 문하에 속하는데 훗날 정도전이 이색을 궁지
               로 몰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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