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대한사랑 15호(2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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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이 나오게 된 배경                              만, 하늘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늘

              이렇게 지어진 ‘조선’이라는 이름이 어느날                    이 되어 천하를 한 집안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기자와 관련되어진 것이다. 이성계가 왕으로                      그러므로 본성적으로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착

            오르는 명분을 만든 이들은 고려말 낮은 자리                     한 것이며 나의 편이고, 이를 반대하는 것은 적

            의 벼슬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흔히                    이므로 응징을 해야 한다.
            ‘신진사대부’라는 말로 표현을 하는데 이는 맞                     이런 성리의 논리가 만들어진 것은 송의 후

            는 말이 아니다. 필자의 생각은 이성계를 올린                    기부터였다. 5대라는 혼란기를 평정하면서 세

            사람들은 ‘성리파(性理派)’로 부르는 것이 합당                   운 송은 군사력을 제어하면서 경제 중심의 국
            하다고 본다. 필자가 정의하는 유학파는 하늘                     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생각지 않게 북방 민족

            의 명을 받은 왕을 중심으로 철저한 신분제를                     인 거란의 공격을 받고 황하 이북 땅을 내줘야

            고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각 신분마다 할                     했고, 이어 금의 공격으로 회하 이북까지 내줘
            수 있는 행동의 범주가 정해진 것을 바탕으로                     야 했다. 이런 엄청난 혼란은 송의 관료와 선비

            하는 것이다. 이 정의의 활용 범위는 국내이다.                   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
            성리파들은 유학적인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지                      은 돈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돈과 물자로





































                 평양 기자릉ㅣ고려시대에 유학자들에 의해 기자사당이 만들어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자리에 허묘(墟墓)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묘로 부르다 고종 때부터 기자릉으로 올려 불려졌다. 기자의 본래 무덤은 하남성 상구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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