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대한사랑 15호(2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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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민족사학계 인 제(齊)나라 환공이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에서 많이 주장하는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 갈 어쨌든 고조선 시기이다.
석산과 마찬가지로 이곳 산동성 무체현의 갈석 성터 유적이 남아 있는 현장에 도착한 것은
산도 위 문헌 기록과 부합하지 않는다. 고조선 3시 30분 경이었다. 말 그대로 허허벌판으로
말기 진 장성의 동단 기점과 연관된 갈석산을 가이드였던 손문걸 사장이 아니면 찾아오기 힘
찾는 것이 고대 강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하 든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넓디넓은 보리밭을
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로질러 남아 있는 성벽과 유지비를 보았다.
도자기나 기와 파편 조각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창주시 고피성유지를 가다 널려 있었다.
갈석산에서 내려와 안휘성의 대표 면 요리인 고피성 유적은 하북성 연안지역의 진·한시대
우육판면 한 그릇을 비우고 2일차 마지막 답 성곽 건축과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실물
사지를 향했다. 하북성 창주시 남피현에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유적은 사각형
고피성(古皮城) 유지이다. 이제 산동성을 벗어나 구조로 동서 길이는 465m, 남북 길이는 426m
하북성으로 가는 것인데, 두 시간이 넘게 걸리 로 약 20만㎡에 달한다. 성벽은 토축 방식인데
는 곳이다. 고피성은 상(商)나라 시기에 지어진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 된 북쪽과 서쪽 성벽을
것으로 보기도 하고 춘추시대인 서기전 681년 보았다. 북쪽 성벽의 잔존 높이는 35m, 두께는
20m인데 남아 있는 성벽에 올라 보니 옥수수
밭만 무성했다.
피성(皮城)이란 이름은 제나라 때 가죽 갑옷
을 생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가이드
의 말로는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지명이라고
한다. 앞서 무체현 갈석산에 오르면서 보았던
『상서』 ‘우공’편의 “도이피복(島夷皮服)”이란 기
록이 생각났다. ‘도이족들은 가죽으로 만든 옷
을 입었다.’ 도이족은 동이족의 별칭인데 그렇
다면 이곳 고피성은 동이족과 관련된 유적지가
아닐까?! 다음호에서는 하북성과 요녕성 지역
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고피성 유지비, 성벽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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