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대한사랑 15호(2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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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았다. 1884년 최시형과 함께 공주(公州) 가섭사(迦葉寺)에서 49일 수련을 하면서 동학

            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동학의 여러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최시형으로부터 충의
            대접주(忠義大接主)에 임명되었다.



            동학 혁명 북접 통령(統領)으로 나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북접 호서동학군(湖西東學軍) 통령(統領)으로 참전하

            였다. 옥천군(沃川郡) 청산면(靑山面) 문암리(文岩里)에 집결한 동학군을 지휘하여, 논산(論山)
            초포에서 전봉준(全琫準)이 지휘하는 남접 호남 동학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공주

            를 점령하기 위해 치른 이인(利仁)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우금치(牛禁峙)전투에서 패

            배하였다. 이후 논산 황화대(皇華臺) 전투를 거쳐 정읍(井邑)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시 북상
            하여 충북 영동과 보은(報恩) 종곡, 충주(忠州) 무극에서 관군·일본군 연합부대와 싸웠으

            나 패하였고 자신이 이끌던 동학군을 해산하였다. 이후 관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탄압
            의 손길이 크게 미치지 않는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지내면서 교세 확장과

            포교에 힘썼다.



            동학의 지도자가 되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피신 생활을 하면서도 최시형을 모시었고, 1897년 12월 24일 동

            학의 종통을 이어받아 3세 교조가 되었다. 한편 관에 자수한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
            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함으로써 순도한다. 교조가 된 뒤 동학 교단의 내분을 통합

            하고 풍기(豐基)에서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설법식(設法式)을 거행하여 지도 체
            제를 확립하였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독립협회 인사 등 개화파 인물들과 만나서 일부는 동학에 입도시켰으

            며, 이들로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국제 정세를 읽고 정치 수완을 발휘할 줄 알았던 지략가였다. 러일전쟁이 일어

            나기도 전에 일본이 승리할 것을 예견하였다. 당시 절대적인 전력은 당연히 러시아의
            승리로 점쳐질 때였다. 손병희는 조선도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하여 일본과 함께

            전승국의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일본 정부에 군자금을 지원

            하려고도 했다. 이는 일본의 힘을 빌려 러시아와 일본 양쪽을 견제하겠다는 전략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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