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대한사랑 15호(202503)
P. 39

2025. 3

                       위를 전개함으로써 대한인의 독립 의지와 열망을 알리고, 일본과 여러 나라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견서와 청원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고종의 독살로 의심되는 사망으로 독립운동을 구

                       체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실무를 최린(崔麟)과 오세창(吳世昌)에게 일임하였다. 구 대한

                       제국 관료 접촉, 기독교계와 불교계, 그리고 학생계와의 연합전선 형성을 차례로 추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측에서 독립운동 자금 5천 원을 청구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흔쾌히 수용하여 기독교 대표 이승훈(李昇薰)에게 전달케 하였다. 천도교·기독교·불
                       교의 연합전선으로 만세운동 준비가 무르익던 1919년 2월 권동진 집에서 민족 대표로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33명으로 결정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였는데 이 과정에
                       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승희(申勝熙)에게 발각되어, 이종일이 보고하자 거금 5천

                       원을 매수 자금으로 주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2월 28일 가회동 손병희 집에 민족
                       대표들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고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번에 우리 거사는 조선의 신성한
                         유업을 계승하고 아래로 자손만대의

                         복락을 작흥하는 민족적 과업이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제현의 충의에
                         의지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

                         심치 않는다”



                        라고 하여, 만세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

                       될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 그리고 탑골공
                       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하면 불상사가 일어

                       날 우려가 있다고 보고, 탑골공원 부근 태

                       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경무 총감부의 심문을 받고 검찰로 송치되                          고려대학교 서관 문과대 앞 손병희 흉상



                                                                                              37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