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대한사랑 15호(20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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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되어 함경도 일대에서는 의병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이에
그동안 유지되었던 교정일치(敎政一致) 대신 교정분리(敎政分離)를 선언하였다.
동학에서 천도교로
1905년 12월 1일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언론을 통해 그동안 불리던
‘동학’이 ‘천도교(天道敎)’로 바뀌었음을 널리 알렸으며, 1906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하였
다. 2월 16일에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공포하고 서울의 다동(茶洞)에 천도교 중앙총
부를 설치하였다. 이후 전국을 72개 대구역으로 나누어 대교구를 설치하고, 그 아래 지
역별로 교구를 두어 근대적 종교의 틀을 갖추었다. 이외에도 전교규례(傳敎規例)·입교식·
치성식 등 종교의례도 근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일진회의 송병준, 이용구와 기타 세력 간의 반목이 심해져서, 손병희는 친일 조직인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림으로써 이들과 결별하였다. 가장 신임하여 재정까
지 맡긴 이용구는 천도교와 분리하여 시천교(侍天敎)를 설립하였다. 이용구 등은 그동안
교단 재정권을 거의 위임받아 처리해서 교단의 모든 재산이 그들 명의로 되어 있어 천
도교의 재정적 타격은 컸다. 당면한 재정난 해결을 위해, 1907년 4월 성미제(誠米制)를
실시하였다. 이후 1911년 조선총독부가 ‘이중과세’라고 하여 기명 성미제를 금지하자
무기명 성미제로 변경하였고, 이는 1919년 3.1 혁명 당시 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
다.
교육과 출판 사업에 매진하다
1908년 1월 18일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 직을 승계토록 하였다. 국내 최초의 대판
형 신문인 기관지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하였다. 일본 생활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
정신을 함양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교육임을 깨닫고, 귀국 후 학교를 설립하
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여러 학교를 후원하였다. 그중에서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
성전문학교와 동덕여대의 전신인 동덕여학단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3.1 혁명을 주도하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 계획과 신한청년당 및 기독교계의 독립운
동 계획을 듣고 독립 선언 방식의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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