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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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소속시켰다. 북송 말기에 창주는 송나
라와 요나라 사이 중요한 변방 요새로 군사
적 가치가 매우 높아 11세기 중후반에 대규
모 개축이 이루어졌다. 그 후 명나라 초기에
창주의 치소를 옮기면서 옛 치소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구성(旧城)’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
재 학계는 유주를 북경과 천진을 포함한 하
북성 북부의 일부와 요녕성, 그리고 길림성
서남부에 위치한 역사상 행정구역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하북성 동남부에 위치한
창주구성이 유주 발해군이었다는 것은 연구
할 필요가 있다.
이 유적은 2021년에 ‘하북 100년 100대
고고학 발견’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성벽은
창주시 유전 채굴 시설 (위)
창주구성공원 (아래) 대부분 훼손되었고, 서쪽과 남쪽에 잔존 구
간이 일부 남아 있는 정도였다. 오히려 눈에
띈 것은 후주(后周) 시기인 953년에 제작된 철
사자상이었다. 창주 철사자는 중국에 현존
하는 가장 오래되고 큰 주철 사자상으로 당
창주 철사자상
시의 주조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다. 전설에 의하면 과거에 창주 지역은 요룡
(妖龍)이 일으킨 해일과 검은 바람으로 큰 피
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때 문수보살의 황금
빛 사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요룡을 물리치고
지역 주민들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전
설을 통해서 보면 창주는 발해만과 인접한
지역으로 고대에 해일과 홍수 피해가 빈번한
지역으로 구하하초(九河下梢)로 불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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