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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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을 수행했다.

              5월에도 천마산대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7일에는 의주군 고관면 서하동에서 친일 분
            자를 응징했고, 9일에는 철산군 여한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18일에는 창

            성군 신창면 세덕동에서 헌병 보조원을 사살하며 일제의 지배 구조를 흔들었다.

              6월부터는 더욱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6월 4일 삭주군 구곡면 신안동 순사 주재
            소를 공격해 순사 1명을 사살하고 1명을 부상시켰다. 6일에는 강계군 문옥면 사무소

            를 급습해 공금 700원을 탈취하고 문서를 소각했다. 8일에는 벽동군 송서면 사무소를
            공격해 같은 액수의 공금을 확보하고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에도 천마산대는 끊임없이 작전을 전개했으며, 6월 16일에는 ‘천마산대 군제 약

            정’ 당시 130여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천마산대의 전체 규모는 최대 200명, 많게는
            500명으로 추산되기도 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은 반격에 나섰다. 3월부터 일본군과 경찰 100여 명이 천마
            산을 포위 공격했고, 6월과 7월에도 대대적인 총공격이 이어졌다. 결국 천마산 유격대

            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일본군이 천마산대 본부를 공격 함에 따라 만주로 이동하여

            오동진 장군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합류했다. 1920년 8월 대한광복군사령부가 설
            립되자 선생은 광복군총영에 합류, 제4영장으로 임명됐고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3중대

            장을 맡았다.

              1920년 8월 7일에는 천마산대 단원 김효준(金孝俊), 김봉한, 한치봉 등이 함께 평북
            창성군 청산면 용암동 거주 강세흥, 강문섭, 강병정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김봉

            한에게 전달하여 만주 관전현(寬甸縣)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전달하게 하였다.



            최시흥 장군의 단학회 활동

              1920년 8월 15일 2대 단학회장 계연수 선생이 만주 관전현 홍성납자에서 밀정 감영
            극 무리들에 의해 잡혀 피살당하자, 이후 최시흥 장군은 3대 단학회장도 맡게 되었다.

            그의 친동생인 최시찬은 단학회의 재정 보조 역할을 맡았다. 최시흥이 단학회 3대 회장
            이고, 동생 최시찬이 단학회 일을 보았다는 것은 당시 천마산대 단원이었던 독립운동

            가 오봉록 지사의 증언이다. 오 지사는 천마산대 단원 66명의 활동을 증언했다. 최시흥

            이 3대 단학회장이라는 이 귀중한 증언은 2대 단학회장과 1대 단학회장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 『환단고기』 초간본을 편찬한 계연수 선생의 실존에 대한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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