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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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이며, 그 단체인 단학회에 대한 증명도 될 수 있다.
오봉록(吳鳳碌, 1902∼1981) 지사는 1977년 4월에 천마산대 대원의 이름과 활동을 기록
하여 『삭주군지』에 실었다. 총 66명의 명단에 마지막으로 이유암[李裕岩, 이유립(李裕笠)의
오기]을 소개하면서 “삭주군 출신. 나이가 어려 천마산대의 통신원으로 활동했다”고 썼
다.’(삭주군민회, 『삭주군지(朔州郡誌)』, 1991, 66∼68쪽.) 이유립 선생은 단학회의 6대 회장
이 되며 해방 이후 계연수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환단고기』를 세상에 널리 알린 대학
자가 된다.
이처럼 최시흥 장군은 천마산대의 활동과 더불어 우
리 한민족의 역사를 지키고 밝히는 단학회 활동을 병
행해 나간 것이다.
천마산대는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민사(義民
社)·벽파대(碧波隊)·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의 무장독립
운동에 그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통의부에 편입되어서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오봉록 지사(1924.3.25) ⓒ독립기념관
일제는 최시흥을 잡는데 현상금 5천원(약 2억)을 걸
었다. 일경의 포위가 좁혀지자 선생은 1922년 대원들을 안전하게 만주로 이동시키고
뒤이어 만주로 가던 도중 중국 관헌에 체포됐다. 최시흥이 체포되고, 1923년 말 유격
대원들이 대거 체포됨에 따라 국내 활동은 거의 종식되고 말았다.최시흥은 장춘 일본
영사관을 거쳐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송되자 갖은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럼
에도 선생은 법정에서도 재판관을 준엄하게 꾸짖는 등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일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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