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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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반대하여 탄압받았다. 충무공 이순신 통제사의 처가이기도 하다.
만해 집안은 홍성에 자리 잡은 이양공 파의 지손(枝孫)으로 한용운은 어려서부터 한학
의 기초 소양을 닦았다. 이름은 유천(維天)으로 불리었고, 본적 명은 정옥(貞玉)이다. 6세
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란 칭송이 자자하였다. 19세에 1
차 출가하여 27세 때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수계하고 29세 때 건봉사에서 정만화(鄭
萬化) 대선사에게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고 용운(龍雲)이라는 법명과 만해(萬海, 卍海)라는 법
호를 받았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고향 홍성군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고, 당시 관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부친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 혁신에 앞장선 승려 한용운
31세 때인 1909년 표훈사 강원의 강사가 되었다. 이때
당대 금강산과 설악산 일대에 널리 알려진 교학의 대가
이학암(李鶴菴) 스님 밑에서 불교 경전, 교리 논저에 대한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 된다. 《대승기신론》, 《능가경》, 《원
각경》, 《화엄경》 등의 방대한 불경을 공부하였다. 또한 중
국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을 만해 한용운이 팔만대장경을 다이
제스트 한 불교대전
접하면서 근대 사상을 다양하게 수용되었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여 《조선 불교 유신론朝鮮
佛敎維新論》를 탈고하였고,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중의 결혼 생
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는 것이 이유였다.
1912년 초부터 양산 통도사에 틀어박혀 그곳에서 해인사 장판(藏版)을 종이로 찍어
제본한 《팔만대장경》 1,511부, 6,802권 전체를 통람(通覽)하였다. 이어 이를 요약한 단
권 《불교대전(佛敎大典)》을 1914년 4월 30일 부산 범어사에서 발행한다. 이는 대장경의
대중화와 현대화 그리고 불교의 사회화에 큰 획을 그었다. 이후 1917년 12월 3일 오세
암에서 대각하였다. 그가 도를 깨쳤다는 것은 종교적 심성을 고양했다는 의미를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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