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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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는다. 종교적 각성은 반드시 대중의 구원이라는 대승적 보살행과 융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라는 유마힐(維摩詰) 거사의 가치관을 체화
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미국과 중국 등 해외 포교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당시 상황은 이를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취급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독립선언서 끝에 공약 3
장을 추가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이후 체포되어 투옥 생활을 했다. 옥중
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조선 독립의 서(書)》를 완성하였다. 당시 일본 검사가 독립선언을 하는 까닭이 무엇이
냐고 물었을 때,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노릇, 감히 일본인이 우리를 재판할 자격이나 있
느냐!”고 호통치고, “할 말이 너무 많으니 차라리 서면으
로 답하겠다”해서 완성된 문장이다. 이 글은 대한민국 임
시정부에 전달되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25호
(1919. 11. 4. 대한민국 원년(元年) 11월 4일)에 전문이 게재되었
다. 옥살이 후 만해 언어의 정화(精華)라 할 수 있는 《님의
침묵》을 출간하였다. 《님의 침묵》은 아름다운 우리말과
한글 그리고 충청도 사투리와 토속어로 당시 조선 사람
들의 민중 정서가 있다고 하겠다.
님의 침묵 초판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인제 백담사 경내에 있는 만해기
념관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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