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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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6



                       심우장의 한용운

                        이후에도 독립운동기구 신간회

                       창설에 참여하는 등, 사회단체 활동
                       과 불교 청년조직을 항일 운동에 걸

                       맞게 바꾸기도 하였다. 잡지 발행과
                       반일 강연 활동 그리고 소설 등 작

                       품 집필을 계속하였다. 1937년 4월

                      13일 서간도 독립운동단체의 지도
                       자였던 김동삼이 경성 감옥에서 사

                       망하였는데,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는 심우장 ⓒ국가유산청
                       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
                       자 만해는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고, 징

                       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

                       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
                       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성북동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다 중풍으로 고생하던 만해

                       는 광복을 1년 앞두고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입적하였

                       다.



                       그에 대한 평가
                        아름다운 우리 말글이 살아있는 대하 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저자 벽초(碧初) 홍

                       명희(洪命熹, 1888~?)는 “7,000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고 했고, 민족 사학자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2~?)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청년들은

                       만해를 본받아야 한다.”라고 했다. 산강재 변영만(卞榮晩, 1889~1954)은 “한용운 선생의

                       몸은 모두 담력으로 이루어졌다.(龍雲一身, 都是膽也)”라고 했다. 평소 입이 거칠고 곡차(술)
                       를 좋아한 괴짜 스님으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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