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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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7

                     운곡의 생애와 태종 이방원과의 인연

                       운곡은 어려서부터 수재로 이름이 났었는데, 성장하면서 문장과 학문의 뛰어남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운곡의 어머니는 집이 가난하여 세금을 내기가 어려워 운곡이 진

                     사가 되기를 원했다. 이에 운곡은 부득이 개경으로 올라가 국자감시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때 운곡의 나이가 30세 되던 해로 공민왕 9년(1360년)이었다.
                       운곡은 국자감 진사가 되면서 관료로 진출하여 출세의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이성계

                     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자 모든 벼슬을 뒤로 한 채 고향인 원주 치악산(치악산국립공원

                     매표소 바로 위 쪽)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게 되었다. 운곡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이방원의 어린 시절 스승으로서 사제의 학연이 있었는데, 이방원이 조선 제 3

                     대왕 태종으로 즉위하자 요직에 기용하려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한다.









                     운곡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태종은 직접 원주

                     치악산으로 찾아 나섰다.(잠시 말을 멈춰 머물렀

                     다 하여 ‘주필대駐蹕臺’라는 표석이 있다. 흔히 ‘태
                     종대’라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운곡은 더 깊

                     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운곡은 개울가에 빨
                     래하는 노파에게 자신을 찾는 사람이 오거든

                     횡지암 쪽으로 갔다고 일러주라는 당부를 했

                     다. 그리고 본인은 그 반대 방향인 비로봉 동
                     쪽 바위굴 변암으로 가 숨었다. 태종은 노파
                                                                                  태종대(주필대) ⓒ운곡학회
                     가 가르쳐주는 곳으로 갔으나 끝내 찾지 못하

                     고 돌아갔다. 나중에 자신에게 길을 물었던 사람이 임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노파는 임금에게 거짓을
                     아뢰었다는 죄책감으로 빨래터 아래 소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소를 ‘노구소’라 부르며 마

                     을에서는 매년 노파에 대한 제를 올리고 있다. 그리고 인근 지명 중 ‘배향산’은 태종이 만나지 못한 스승
                     을 향해 예를 갖춰 절을 했다는데서, ‘수레넘이고개’는 태종의 수레가 이 고개를 넘어갔다는데서 비롯되

                     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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