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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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정신을 담는 그릇의 뿌리 그러나 간송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훈민정
와 기원을 허구화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 음해례본》을 찾는 데 사활을 걸었다.
다. 일제는 인류 최고의 문자 훈민정음 자체를 194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소재 되어있던
없애는 인류사적으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훈민정음해례본》은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
큰 범죄를 저지르려고 한 것이었다. 구당(肯構堂)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 김씨
하지만 상제님이 보호하는 우리 대한이다. 문중의 가보였다고 전한다.
세종대왕 등이 직접 펴낸 《훈민정음해례본》은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
오랜 세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40년에 경상 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해례본》을 몰래
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
책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들여 지금은 간송 던 중 선생이었던 김태준을 통해 간송 선생에게
미술관(서울 성북구)에서 소장하여 현재까지 내려 《훈민정음해례본》을 만원에 넘겨주었다. 이용
오고 있다. 해례본은 1962년에 대한민국 국보 준은 판매가로 천원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문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화재의 가치를 정확히 치르는 것으로 유명했던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15년에 간송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만원을
는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 복간본을 펴냈다. 치렀다. 당시 천 원이면 좋은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거간 노릇을 한 김태준에게
《훈민정음해례본》을 지켜라! 는 수고비로 1천 원을 주었다고 한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1940년대 초기에 이미
우리나라를 넘어 동북아시아에 이름이 알려진
대수장가였다. 간송은 김태준(金台俊)이라는 당
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국문학자로
부터 《훈민정음해례본》의 실존 소식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일제는 조선에서 발생하는 민족주
의와 사회주의를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
했다. 여기에 《훈민정음해례본》을 찾아 없애려
고 혈안이 되어있던 일제였다. 당시 간송은 문
화적 민족주의의 대명사였고 김태준 역시 일제
로서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사회주의자였다. 이
둘이 만난다는 것은 너무 눈에 띄는 일이었다. 훈민정음해례본 세종 28년(1446년) 국보 70호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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