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대한사랑 8월호
P. 44
사진을 촬영하여 만든 영인본이 제작되었다. 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이라고 생각
간송 영인본 제작을 위해 이 소장본을 흔쾌히 했다. 간송의 문화재 수집과 보호 전수 노력이
내놓았다고 한다. 내놓은 것뿐만이 아니라 책 없었더라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들이 우리
을 한 장 한 장 해체하는 것까지 직접 했다고 세대에 전달되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이
한다. 때문에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간송에 대한 지지
는 거의 절대적이다. ‘돈은 이렇게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독립운동, 문화재 수집과 보존 다’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이다.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년 7월 29일 ~ 1962년 1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葦滄)
월 26일)의 집안은 증조 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 오세창(吳世昌)과 함께 국외로 반출될지도 모르
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 상권을 장악한 10만 거나, 빛을 보지 못한 채 잠들어 있는 문화재
석 대부호 가문이었다. 서울을 넘어 전국 최고 들을 수집했다. 그렇게 모아둔 문화재들을 보
의 부호였다. 그는 이 막대한 재산을 허투루 관하고 연구하기 위해, 보화각(葆華閣)을 1938
쓰지 않고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지켜 년에 설립했다. 보화각이라는 이름은 오세창이
내는 데 바쳤다. 간송은 문화재 수집과 보존 지은 것으로,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라는
2024년 재개관한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
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