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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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누스 2세로부터 부황제에 해당하는 ‘카이                     작되었다. 10세기 후반에는 비잔틴 제국이 바

            사르’라는 칭호를 받았다. 불가리아 동쪽의 마                    이킹족인 루스를 끌어들여 불가리아를 공격하
            다라 절벽에 새겨진 ‘마다라 기사상’은 바로 이                   게 하였다. 968년 키예프 루스 군대는 불가리

            테르벨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아 수도 프레슬라프를 공격하고 당시 불가리

              테르벨은 그 후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3                   아의 보리스 칸을 포로로 잡아갔다. 1014년에
            세와 조약을 체결하였는데,(716년) 이 조약에서                  는 비잔틴 군이 불가르 병사들을 대거 포로로

            는 양국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국경선                     잡아서, 백 명당 한 명씩만 남겨두고 모두 눈알
            을 확정하고 교역의 장소와 교역품 및 교역량                     을 빼버리는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불가

            등을 상세히 규정하였다. 유목민인 불가르족에                     리아 왕국은 이때 멸망하고 말았다.

            게는 비잔틴과의 교역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                      그로부터 70년 후인 1185년 불가르 귀족 테
            다. 양국간의 관계는 교역을 통해 더 밀접해졌                    오도르 형제에 의해 불가리아는 비잔틴 제국으

            다.                                           로부터는 다시 독립하였지만, 1396년 오스만
              그 후 계속 세력이 커진 불가리아 왕국은 10                  투르크에 의해 정복되어 또다시 멸망하고 만

            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아, 그리스와 크로아티                     다. 이로써 중세 불가리아는 막을 내리고 이후

            아를 제외한 발칸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                     불가리아는 19세기 후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다. 테르벨 사후 비잔틴 제국은 국경을 강화하                    지배하에 고통받게 되었다.

            고 그곳에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이주민들을 정                      불가르족은 다뉴브 하류 지역에 정착하여

            착시켰다. 이 때문에 양국 간의 갈등이 다시 시                   국가를 건설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전통을 상
                                                         당 기간 유지하였다. 물론 불가르족의 고유한

                                                         종교에 관해서는 ‘텐그리’라고 불리던 천신에
            마다라 기사상
                                                         대한 숭배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마다라 기사상 주변에는 그리스어로 새

                                                         겨진 비문이 남아 있는데, 이 비문에서 불가르
                                                         족의 종교와 관련된 일부 단서를 확인할 수 있

                                                         다. 글씨가 심하게 마모된 상태라서 전문의 해

                                                         독은 불가능하지만, 불가르 칸은 자신의 왕권
                                                         이 텐그리 신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믿고 제물을

                                                         바쳤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때의 제사는 동
                                                         물을 제물로 바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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