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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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고 있었다. 로마의 니콜라스 교황과 비                     동료들은 전에 키릴 형제가 만든 글라골 문자

            잔틴의 포티우스 총주교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                     (Glagolitic)를 개선하여 키릴 문자를 완성했다. 이
            어 서로를 파문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로                    것이 오늘날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유럽 일대에

            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에서 저울                     서 널리 사용되는 문자이다. 클리멘트 일행은

            질하던 보리스 칸은 로마 교황이 불가리아 교                     교회 문서와 성경, 예배서 등을 키릴 문자로 번
            회의 독립을 허용할 생각이 없음을 깨닫고 다                     역하여 보급하였다. 그 결과 불가리아 교회는

            시 비잔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콘스탄                    그리스 문자로 된 교회 전례서에 의존할 필요
            티노플 총주교로부터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가 없어져 보리스 칸이 바라던 대로 불가리아

            인정받았고, 이것이 불가리아 정교회의 시작이                     교회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었다. 클리멘트는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보리스 칸에 의해 불가리아 교
              보리스 칸은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을 위해서                    회의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는 비잔틴에서 파견된 그리스인 성직자들에 의                      기독교로 개종한 보리스 칸은 장남인 블라
            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디미르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수도원으

            는 그리스어가 아니라 불가리아인 다수가 사                      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처럼 기독

            용하는 슬라브어로 교리서와 문서가 번역되고                      교를 따를 마음이 없었다. 블라디미르는 전통
            보급되어야 했다. 이 일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                   적인 신앙을 유지하려했고, 이 과정에서 플리

            이 바로 ‘슬라브 사도들’ 즉 키릴(826-869)과 메              스카 주교를 비롯하여 많은 기독교도들이 학

            토디오스(815-885) 형제의 제자들이었다. 키릴                 살되었다.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학살에 분개
            은 원래 이름이 콘스탄틴이었는데, 후일 로마                     한 보리스 칸은 수도원에서 돌아와 아들을 왕

            에 가서 키릴로 개명을 했다. 형제는 비잔틴 황                   좌에서 몰아내고 귀족들 전부를 소집하여 회의

            제의 명으로 862년 모라비아 왕국으로 파견되                    를 열었다. 소위 893년의 ‘프레슬라브 회의’인
            어 선교활동을 하다가 동생 키릴은 로마에서                      데 이 회의에서 블라디미르를 퇴위시키고 그의

            수도사로 생을 마감했고, 형 메토디오스는 모                     동생 시메온을 왕으로 앉혔다. 그리고 기독교
            라비아에서 주교로 활동하다 죽었다. 두 형제                     를 국교로 선포하고 교회에서 사용되던 슬라

            에게는 클리멘트와 나움 등 여러 제자들이 있                     브어 즉 클리멘트 일파가 표준화한 슬라브어

            었는데, 이들은 885년 독일 교회의 압력으로                    를 국가의 공용어로 선언하였다. 시메온 왕은
            모라비아에서 쫓겨났다. 보리스 칸은 이들을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플에 유학하면서 그리스

            적극 환영하고 마케도니아의 오리드 지역에 정                     학문을 배웠는데, 그리스 학문에 상당히 능숙
            착시켰다. 오리드의 신학교에서 클리멘트와 그                     하여 ‘반(半)그리스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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