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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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한 세기 뒤 비잔틴 제국의 수도사 테오파네 관계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불가리
스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당시 불가리아의 크 아는 슬라브족의 모라비아, 세르비아, 크로아
룸 칸이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성벽 근 티아 등과 서쪽에서 연이어 전쟁을 치르고 있
처에서 올린 제사 의식을 “더러운 악마적 의식” 었고, 이런 상황에서 비잔틴 제국을 자기편으
이라고 비난하였다. 비잔틴 사람들이 보기에 로 만들기 위한 외교적 방책의 하나로 기독교
좀 더 끔찍했던 관행도 있었다. 크룸 칸은 전 로 개종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좌
사한 비잔틴의 황제 니케포로스의 머리를 잘라 우간 그는 비잔틴의 미카엘 3세 황제를 대부로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이는 스키타이 삼아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비잔틴의 성직자
나 흉노 등 유목민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 들이 불가리아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할 수 있
는 관습으로, 불가르족이 동방 유목민의 관습 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을 따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리스 칸은 기독교로 개종했더라도
하지만 이러한 불가르인들의 나라도 결국 기 불가리아 교회의 통제권이 비잔틴 제국으로 넘
독교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어가도록 허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비잔틴
삼게 되었다. 기독교는 그리스인 포로들이나 교회 즉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영향력에서 벗
망명자들을 통해 불가리아로 전파되었다. 동방 어나기 위해 로마 교황청과도 접촉하였다. 그
유목민의 후예였던 불가르 귀족들은 처음엔 대 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는 기독교의 교
체로 기독교에 반감을 가졌지만, 왕실 내에서 리와 의례에 대한 많은 질문이 담겨 있었다. 심
도 개종자가 나왔다. 예를 들어, 오무르탁 칸 지어 당시 국가통치와 관련되어 비잔틴의 성직
(재위 814-831)은 비잔틴의 고위 성직자 몇 사람 자들이 가르치던 내용에 대해서 교황청의 의견
과 장군들을 비잔틴 제국의 스파이로 몰아 처 을 구하기도 했다. 교황청은 보리스 칸의 질문
형했던 사람인데, 그의 장남은 자신의 노예를 들에 대해 109개 장에 달하는 긴 답신을 보내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개종하였다. 그러나 그 왔다. 이 서한을 통해 당시 불가르족의 신앙을
는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 일부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제35장에서는
었을 뿐 아니라 죽임을 당했다. 불가르족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점을 치고 주
처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불가리아 칸은 문을 외우는 관습이 있다고 하였는데, 교황청
보리스 1세(재위 852-889)이다. 그의 여동생은 오 은 이런 이교적 관습을 버리고 교회에 가서 죄
라비보다 먼저 기독교도가 되었다. 보리스 칸 를 회개하고 기도한 후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
이 귀족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기독교를 받아 고 가르쳤다.
들인 배경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치적 이해 그런데 당시 상황은 보리스 칸에게 유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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