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대한사랑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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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 족보 조사차 만난 관련 대종회 종친은
신라시대 대문장가 강수가 틀림없이 석씨 집
안사람으로는 전해져 왔는데 그 후손 집안을
찾을 수가 없어 오랜 기간 추적하였다고 하며
『대동보(大同譜)』를 내면서 강수와 그 후손을 찾
아 족보에 기록하게 되었다고 사연을 전해 주
었다.
황남대총 복분 금관 ©국가문화유산포털
세 성씨가 이끈 신라사의 올바른 조명이 필요한 때
신라 왕조사에서 박씨, 석씨, 김씨 왕계에 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2천 여개의 박혁거
한 평가는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고 세를 모시는 신사와 신라계 여러 신사들이 한
조선 유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진한 6부가 박혁 일 고대사의 한 주축이 가야와 백제와 더불어
거세를 중심으로 국가건설의 푯대를 세우게 되 신라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었고 그 뒤를 이은 석씨 왕조는 석탈해를 중심 세계 금관(金冠)의 대부분은 신라에서 출토된
으로 철기 문화를 통해 초기 국가의 기반을 다 것이고, 신라는 현존 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
진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대를 남겨 놓았고, 모나리자 미소보다도 세계
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본다면 초기의 인들을 황홀하게 만드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신라는 가야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다. 이 을 만든 국가이다. 경주 도심 고분에서 발굴된
과정에서 고구려계로 왜 열도 구주지역에 살 화려한 황금문화를 보여주는 금은 장신구와
고 있었던 다파나국 출신의 석탈해의 신라 왕 유리그릇이나 유리잔 등은 비단길 또는 바닷
계 진입은 당시의 신라 역사에 신선한 충격을 길을 통해 서아시아지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파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뒤 이은 소호금천씨의 후 악되고 있어 당시 신라는 글로벌한 국가였음
예로 자칭하는 김씨들의 왕계 출현은 신라사의 을 보여 준다.
중흥과 더불어 붕괴를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 3명의 성씨가 서로 왕을 주고받으며 천년이
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최근에는 연 란 시간을 통치한 신라의 역사는 단순한 왕권
구 성과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로 한일 경쟁의 역사를 넘어 당시 세계를 향해 끊임없
고대사 형성에 신라가 기여한 부분이다. 일본 이 나아가 세계와 소통했던 ‘K-신라사’였음을
이즈모(出雲) 지역의 역사는 신라계 역사로 많이 강조하고 싶다. 그 속에 지워진 석씨 왕조사가
알려져 있다.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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