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대한사랑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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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가 티베트계였지만, 서하는 한족과 위구르 시 거란은 중국 방면 사정이 급했는지 고려에
족을 포함한 다민족국가였다.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서하를 건국한 이원호(재위 1038-1048)는 국명 980년대에 들어 발해 유민들의 발해 부흥운
도 거창하게 ‘대하(大夏)’라고 하고 황제를 칭했 동이 본격화하면서 거란은 이 지역 정세에 민
다. 송나라는 이를 무척 불쾌해하여 매년 서하 감해졌다. 발해 유민들은 후발해와 정안국(定安
에 보내주던 은과 비단, 차 등의 세사(歲賜)를 중 國) 등을 세워 발해를 부활하려 하였으며 송과
단하고 국경지역에서 이뤄지던 호시(互市, 공식적 고려를 포함한 반거란 동맹을 추진하였다. 고
인 국경 무역장)도 폐지해버렸다. 송의 이러한 경 려는 거란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
제적 압박은 효과를 거두어, 결국 대하는 신하 았고, 이에 거란은 고려를 잠재적 위협으로 보
의 나라가 되라는 송나라의 요구를 수용했고, 기 시작했다.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그 대신 송은 서하에 세사 지급을 재개했다. 요 80만 대군(실제 병력은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이
나라도 서하와 때로는 전쟁을 벌였지만, 서하 고려를 침공했다. 이는 송과의 전쟁을 준비 중
를 정복하려 하지는 않았다. 송나라를 견제하 이던 거란이, 송과 손잡을 가능성이 있는 고려
는 수단으로 서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 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
다. 려를 정복할 뜻이 없었기 때문에 청천강 근처
의 안융진 전투 후 고려에 회담을 제안하였다.
고려와의 관계 고려의 서희가 나서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은 송과 서하뿐 아니라 동남방으로는 그 결과 고려는 거란을 상국으로 섬기기로 하
고려와도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고려가 건국 고 그 대신 거란은 당시 여진족이 살고 있던 강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22년, 거란은 사신을 동 6주를 고려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고려는
파견하여 낙타와 말, 모직물을 선물로 보내왔 회담 후 곧 여진족을 소탕하고 강동 6주를 차
는데, 고려가 이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 지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연호를 시행하고 혼
지는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로부터 20 인동맹도 제안하였다.
년 뒤인 942년, 거란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1004년 전연의 맹약으로 거란과 송의 평화
낙타 50마리를 보내왔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 적인 관계가 확립되자, 거란은 고려가 차지한
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친선관계를 맺을 수 강동 6주를 다시 빼앗고자 하였다. 강동 6주
없다고 하면서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 보내 지역에는 교역을 위한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고 낙타는 모두 굶겨 죽였다. 이는 거란 입장에 이러한 시장은 ‘각장(榷場)’이라 하여 당국의 통
서는 엄청난 도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당 제하에 거란, 여진 등 북방 민족과의 교역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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