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대한사랑 9월호
P. 37

2025. 9

            왕가가 티베트계였지만, 서하는 한족과 위구르                     시 거란은 중국 방면 사정이 급했는지 고려에

            족을 포함한 다민족국가였다.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서하를 건국한 이원호(재위 1038-1048)는 국명               980년대에 들어 발해 유민들의 발해 부흥운

            도 거창하게 ‘대하(大夏)’라고 하고 황제를 칭했                  동이 본격화하면서 거란은 이 지역 정세에 민

            다. 송나라는 이를 무척 불쾌해하여 매년 서하                    감해졌다. 발해 유민들은 후발해와 정안국(定安
            에 보내주던 은과 비단, 차 등의 세사(歲賜)를 중                 國) 등을 세워 발해를 부활하려 하였으며 송과

            단하고 국경지역에서 이뤄지던 호시(互市, 공식적                   고려를 포함한 반거란 동맹을 추진하였다. 고
            인 국경 무역장)도 폐지해버렸다. 송의 이러한 경                  려는 거란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

            제적 압박은 효과를 거두어, 결국 대하는 신하                    았고, 이에 거란은 고려를 잠재적 위협으로 보

            의 나라가 되라는 송나라의 요구를 수용했고,                     기 시작했다.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그 대신 송은 서하에 세사 지급을 재개했다. 요                   80만 대군(실제 병력은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이

            나라도 서하와 때로는 전쟁을 벌였지만, 서하                     고려를 침공했다. 이는 송과의 전쟁을 준비 중
            를 정복하려 하지는 않았다. 송나라를 견제하                     이던 거란이, 송과 손잡을 가능성이 있는 고려

            는 수단으로 서하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                     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

            다.                                           려를 정복할 뜻이 없었기 때문에 청천강 근처
                                                         의 안융진 전투 후 고려에 회담을 제안하였다.

            고려와의 관계                                      고려의 서희가 나서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은 송과 서하뿐 아니라 동남방으로는                      그 결과 고려는 거란을 상국으로 섬기기로 하
            고려와도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고려가 건국                     고 그 대신 거란은 당시 여진족이 살고 있던 강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22년, 거란은 사신을                  동 6주를 고려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고려는

            파견하여 낙타와 말, 모직물을 선물로 보내왔                     회담 후 곧 여진족을 소탕하고 강동 6주를 차
            는데, 고려가 이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                    지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연호를 시행하고 혼

            지는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로부터 20                   인동맹도 제안하였다.

            년 뒤인 942년, 거란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1004년 전연의 맹약으로 거란과 송의 평화
            낙타 50마리를 보내왔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                   적인 관계가 확립되자, 거란은 고려가 차지한

            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친선관계를 맺을 수                      강동 6주를 다시 빼앗고자 하였다. 강동 6주
            없다고 하면서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 보내                    지역에는 교역을 위한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고 낙타는 모두 굶겨 죽였다. 이는 거란 입장에                   이러한 시장은 ‘각장(榷場)’이라 하여 당국의 통

            서는 엄청난 도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당                   제하에 거란, 여진 등 북방 민족과의 교역이 이


                                                                                              37
                                                                                              37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