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대한사랑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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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어졌던 것이다. 거란은 고려가 각장에 대한 라 말갈족의 후손인 여진족이 포함되어 있었
통제권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 다. 여진족은 유목보다는 수렵과 어로를 위주
던 것 같다. 이것이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2차 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족속을
전쟁의 한 원인이었다. 물론 거란이 내건 명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거란은 태조 야율아
은 강조가 고려의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옹립 보기 때부터 ‘인속이치(因俗而治)’ 즉 각 족속의
한 죄를 묻겠다는 것이었다. 강조가 30만의 고 전통적 제도를 존중하여 다스린다는 방식을
려군을 이끌고 성종이 직접 지휘하는 40만 거 채택하였다. 이는 행정면에서는 체계를 갖추
란군에 대항하였지만, 패배하였다. 거란군은 어, 정착민인 한족과 발해인의 통치를 위한 남
개경을 일시 점령한 후, 고려가 강화를 요청하 면관(南面官)과 거란 및 유목, 수렵 민족의 통치
자 현종이 직접 거란에 가서 항복하는 친조(親 를 위한 북면관(北面官) 제도로 나타났다. 남면
朝)를 조건으로 철수하였다.(1011년) 그러나 고 관은 도성의 남쪽에 설치했기 때문에 그런 이
려 현종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송나라와 다시 름이 붙은 것인데, 중국식 행정기구들이 설치
외교관계를 맺자, 거란은 1018년 3차 침공을 되었다.
하였다. 거란은 이번에는 개경을 점령하지 못 거란은 족속에 따른 통치를 염두에 두고 다
했으며 강감찬 장군의 반격으로 귀주에서 큰 섯 개의 수도, 즉 오경(五京)도 설치했다. 거란족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 이후 거란이 여진족 의 본거지에는 상경 임황부가 세워졌으며, 그
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고려와의 관계도 정상 뒤를 이어 동경 요양부가 발해 지역에 세워졌
화되었다. 다. 동경 요양부는 한족과 발해인들을 다스리
기 위해 요동 지역에 세워졌으며, 고려와의 분
거란의 통치체계와 멸망 쟁에 대비하는 군사적 요충지 역할도 하였다.
거란은 몽골초원으로부터 황하 이북과 압록 중경 대정부는 내몽골의 해족 거주지역에 세
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서쪽으로 고비사막 워졌다. 남경은 유도부(幽都府)라 하여 오늘날
일대에 걸친 넓은 영토를 지배하였다. 그 지배 의 북경(베이징) 지역에 세워졌다. 베이징 지역이
하에 들어간 족속으로는 한족은 말할 것도 없 예전에는 ‘유주(幽州)’라 불렸기에 그 이름을 딴
고 발해인, 해족 등이 있었다. 해족은 고막해(庫 것이다. 서경은 사타족의 통치를 위해 설치되
莫奚)라고도 불리는 선비족 계통의 유목민이었 었다. 오경은 한꺼번에 설치된 것은 아니고 필
다.(어떤 학자들은 해를 투르크계라고 보기도 한다) 생활 요에 따라 순차적으로 설치되었는데, 가장 마
방식이나 문화면에서 거란과 가장 가까운 족 지막으로 세워진 서경 대동부는 건국으로부터
속이었다. 발해인 가운데에는 고구려계뿐 아니 120년이 흐른 1044년에 오늘날의 산서성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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