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대한사랑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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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일 뿐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천왕(東川王)>조
교과과정의 고구려는 3번의 천도(遷都)를 거
친 국가로 기술하고 있고, 지금도 모든 매체의 그렇기에 학계는 평양 낙랑군을 주장할 것인
역사물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졸본에서 건 지, 고구려 도읍지 평양으로 주장할 것인지 둘
국해 국내성으로 이동했고, 장수왕 시기 지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병도는 아래와
의 평양으로 천도한 것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 같이 자기 입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완전한 거짓이
다. “이때 평양 부근은 낙랑의 수도가 엄연히 존재하
표1. 고구려 천도 기록을 보면 왜 사학계에 고 있던 터이므로 거기로 이도(移都)한다는 것은
서 고구려의 천도를 3번으로 축소하고 위치까 무엇보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
지 조작했는지가 드러난다. 『삼국사기』의 고구 는 까닭이다”(국역 『삼국사기』 상, 1980, 396쪽)
려 천도 과정에 대한 기록은 한국 사학계가 주
장한 기원전 108년에서 기원후 313년까지 평 그러면서 북한의 자강도를 평양으로 주장했
양에 존재했다는 낙랑군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고, 이후 조법종은 환인 지역, 여호규나 기경량
사실이다. 고구려는 247년 동천왕 시기 평양성 은 집안현성이 평양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으로 도읍을 이동했으며, 이후 95년간 그곳은 학계가 주장해 온 3번의 고구려 천도는 거짓
고구려의 수도로 있었다고 기록해 놓았기에 이 된 주장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들이 주
시기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논리 자체가 장한 논리에 의거해 본다면 7번의 고구려 천도
성립이 안 된다. 과정 중 4번의 평양 천도는 각기 다른 평양 지
역임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고구려의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멸망과 관련된 평양도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는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낙랑군과 고구려를 뒤
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 죽박죽 만들어 놓은 현 한국사 속에 고구려와
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한나라와의 관계를 논한 연구 결과나 교과과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 정의 내용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다.”라고 하였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하고만 대전쟁을 했
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仙 는가?
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고구려가 중원 국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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