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 - 대한사랑 11월호
P. 23
2025. 11
2025. 11
(六年, 漢 遼東大守興師伐我. 王遣王子罽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차이나 입장에서
須拒之, 不克. 王親帥精騎徃, 與漢軍戰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坐原, 敗之, 斬首山積.) 하지만, 후한의 패배 인정 여부를 떠나 이 전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천왕(故國川王)>조 쟁을 계기로 그동안 한(漢)정부의 눈치를 보던
요동의 공손탁이 스스로를 요동태수라 칭하고
이 역사적인 사건을 차이나의 사료는 어떻 후한으로부터 독립선언하고 중원 각지에서는
게 기록하여 남겼을까? <바이두 백과사전>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력이 궤멸된
는 이에 대해 해당 기록은 인용하지 않고, 『후 후한 조정으로서는 통제 불가능의 사태로 전
한서』, 『삼국지』, 『삼국사기』의 고구려 신대왕 개되며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후한 조
이 후한 현토 태수에게 패배한 기록을 제시하 정 자체를 전복시킬 정도로 파급력을 끼쳤다.
며 후한의 현토에 고구려가 복속을 원했다는 이 분위기는 중원의 새로운 주인공을 꿈꾸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후한대군 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 한(漢)제국 영역을
(後漢大軍)이 고구려에 패했다는 기록이 두 번 등 경쟁하는 전쟁터로 변모시킨다.
장하는데, 이는 고구려가 후한에게 패했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역임한 박
사실을 두 번을 나누어 실수로 기록한 것으로 은식 선생이 1911년 서간도 윤세복의 동창학
논란이 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의 국력 변화에 교에 1년간 머물 때, 한국인 자제들의 역사교
후한 제국의 멸망 과정을 담은 드라마 ‘삼국지’
23
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