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대한사랑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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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요동으로 고구려 경계를 끌어다 놓고 있다. 국사의 북부 영역은 위만과 전한(前漢) - 신(新)
한국 사학계의 주장을 십분 받아들인다 해 - 후한(後漢) - 위(魏) - 진(晉)의 낙랑군 속국 영
도 후한의 대군과 고구려 명림답부가 한 판의 역으로 수백 년 간 지나(支那)의 고대 영토임을
결정을 치룬 좌원의 위치는 절대로 한반도 평 입증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활용되었다. 그러
양 중심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다 보니 한국사의 전 영역은 존재하지도 않았
고구려가 산서성을 급습하고 요서에 10성을 던 평양 낙랑군과 결부시킨 가공의 역사를 계
쌓았던 경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적어도 좌원의 속 양산시키고 있다. 김수로와 허왕옥도 평양
위치는 이러한 고대 요동의 경계 안팎정도로 낙랑군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출현하
비정할 수 있을 것이기에 평양에 낙랑군을 설 고, 한국의 고대 미술도 평양의 낙랑군의 영향
정한 한국 사학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위치 을 받았다는 주장이 오래 전에 등장하였다. 북
이다. 한학계에서 평양 고분이 한나라 낙랑군 고분이
더욱이 낙랑군이 후한 시기에 완전히 망해서 아니라 고조선계 유적이라고 발굴보고서가 공
역사에서 사라졌다면 모르겠지만, 앞에서 살펴 식 출간된 것에 당황한 한국 사학계는 ‘평양 낙
본 것과 같이 후한의 낙랑군 영역은 조위(曹魏) 랑군을 한나라인들이 속국이나 식민지로 삼았
가 이어서 차지했으며, 이후는 서진(西晉)의 영 다는 것은 일본학자들이 주장한 것이며 평양
역으로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설정 속에서 고 낙랑군은 한나라 영역의 고조선 사람들의 자
구려가 후한의 대군을 물리쳐 400년 한 제국 치구였다’는 수정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러
이 역사에서 사라지는데, 후한의 멸망한 후에 한 카멜레온 같은 현사학계의 고대사 연구 자
도 평양에 조위(曹魏)의 낙랑군, 대방군이 서진 세는 일명 ‘철밥통 고수’라고 지탄 받고 있다.
(西晉)의 낙랑군으로 이어져 313년까지 한반도 한국사가 중국 속국사로 기술되든 말든 상관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논지는 누가 보더 하지 않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장한 평양 낙
라도 어불성설이기에 좌원대첩의 고구려 대전 랑군은 영원히 지켜나가겠다는 것이다.
쟁 역사는 현 사학계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진
실’인 것이다. 중원의 대제국 한(漢)을 문 닫게 만들고 삼국
지 시대를 거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연출시킨
누구를 위한 고구려사인가? 사건이 바로 고구려와 후한의 대전쟁인 좌원대
한국 고대사에 설정된 평양 낙랑군의 망령은 첩이다. 고구려사 기술에 있어 수·당과의 전쟁
한국사 전역을 지배하며 결국 중국의 속국을 사보다도 더 비중 있게 다뤄야 할 중원사를 바
인정하는 동북공정의 결과물로 드러났다. 한 꾼 대전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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