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대한사랑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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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넓혔다. 이로써 동해 중부 이북, 서해 중부 이                   구려는 무역 규모가 엄청나게 컸을 뿐 아니라,

            북, 요동만에서 해양력을 강화했고, 전략적으                     황금·은·모피·무기·말·인삼 등 수출품의 질도
            로 가치가 높은 경기만을 안정적인 내해로 삼                     뛰어났다. 문자왕 때에는 제주도로 추정되는

            아 평양·강화·남양(화성시) 등을 항구로 삼았다.                  섭라(涉羅)에서 ‘가(珂)’라는 보물을 구해 북위와

              이후에 서해를 중심으로 한 동아지중해 각                     무역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4세기부터 일본 열
            국가 간에는 해상권 다툼이 치열했다. 『위서』                    도와도 교류했다. 『일본서기』에는 장수왕 75

            「백제」전에는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년에 왜인들이 고구려와 내통한 내용을 포함해
            보내면서 고구려가 해상봉쇄를 한다고 위기감                      모두 12번에 걸쳐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했다

            을 토로했다. 결과는 장수왕의 공격과 한성 백                    는 기록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에 고구

            제의 멸망이다. 480년에 북위는 고구려가 남제                   려는 중국 지역, 북방 지역, 일본 열도 등과 전
            에 파견한 사신선(船)을 산동 지역의 해상에서                    투, 외교, 무역을 병행하는 해륙국가로 변신했

            나포했으며, 6세기 초에는 남제가 고구려에게                     으며, 북방의 유연, 중국의 남북조와 함께 ‘동
            파견한 사신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이 무렵 고                    아시아 4강’ 체제를 이룰 수 있었다.그렇다면









































                        고구려 전성기의 국제항로도                       장수대왕때 고구려의 등거리외교와 중핵조정 역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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