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대한사랑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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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자가 겨우 2,700여 명일 정도로 수양제는 로 임명했다. 또 중간지역인 요서 지역의 거란
대패했다.(『자치통감』) 수나라는 이듬해인 613년 과 해(奚)를 복속시켜 고구려를 압박하게 만들
과 614년에도 요하전선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었다. 이때 놀랍게도 사할린의 유귀국과 캄차
소득이 없었고 건국한 지 30년 만인 618년에 카반도에 거주한 ‘야차’도 사신을 파견했다.
결국 멸망했다. 이 무렵 고구려, 백제, 신라는 어떤 상황을
고구려가 세계 전사상 최고의 대승리를 거둔 맞이하며 어떤 정책을 취하고 있었을까? 고·
요인은 무엇일까? 물론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는 대당(對唐)정
국제질서의 본질을 파악해서 민관이 철저하 책을 놓고, 요하 전선 중심의 적극적인 대결을
게 준비했고, 유기적인 방어 체제를 전략적으 주장하는 연개소문 세력과, 해양방어·수성전
로 활용한 덕분이다. 또한 고구려인의 자유의 을 선호하는 영류왕 세력으로 나뉘어 권력 쟁
지와 힘, 애국심과 강이식·고건무·을지문덕 같 탈전을 벌였다. 고구려는 서부 전선인 당나라
은 인재들을 활용했다. 그리고 적의 해륙 협공 와는 화해를 취하면서 해양을 통한 기습 가능
작전을 유도한 뒤 역으로 해륙방어작전을 시 성에 대비하고, 북부 전선인 돌궐과 거란을 우
도해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격퇴한 것이 큰 역 호 세력으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실패로 돌
할을 했다. 수나라는 고·수 전쟁에서 대패한 후 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남부에서 백제, 신라를
곧 자체 분열됐다. 당나라는 수를 대체하자 종 외교·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당과의 연결
주권 회복, 중화 중심의 체제 완결이라는 중국 고리를 끊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백제는 고구
적인 숙명도 계승했다. 대운하를 이용해 남북 려와 화해를 시사하면서도 전쟁 발발 전까지
을 하나의 상권과 경제권으로 발전시켰다. 국 도 당나라에 사신을 무려 열일곱 번 보내는 애
력을 신속하게 강화시켰다. 또한 외교술로 북 매한 태도를 가졌다. 반면에 신라는 당나라에
방 초원의 강국인 투르크 제국을 동서로 분열 사신은 물론 유학생과 승려들을 자주 보냈고,
시켰고, 약화된 동투르크를 복속시켰다.(630년) 643년에는 군사의 파견까지 요청했다. 당나라
이어 서남쪽의 강국인 토번(티베트 지방)을 공격 는 결국 신라를 고구려의 대항 세력으로 선택
했고(639년), 문성공주를 시집보냈다. 또한 실크 했고, 전쟁이 벌어지자 신라는 3만 명을 파견
로드 무역망의 확장을 위해 고창국(신강성의 투루 해 고구려를 남쪽에서 협공했다. 결국 유라시
판 지역)을 멸망시켰고(640년), 중앙아시아의 강 아 동쪽의 모든 나라와 종족들이 직접 또는 간
국(康國, 사마르칸트시) 바르후만왕을 ‘강거도독’으 접으로 당나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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