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대한사랑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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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고구려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어느 정 루어진 ‘70년 전쟁’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이
도의 수준이었을까? 고구려는 해양력을 바탕 전쟁은 ‘해륙양면전’이라는 것이다. (윤명철, 『고
으로 남북조 모두에 사신을 파견하는 동시에, 구려 해양사연구』)
등거리 외교를 추진했다. 그런데 양자강 하류
에 수도를 둔 남조국가들과 교섭하는 빈도는
①1단계-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오히려 백제보다도 많았다. 심지어 439년에 장
수왕은 북위와 전쟁을 벌이는 송나라를 위해 400여 년 동안 분열된 중국은 수나라에 의
다른 화물과 함께 군수물자인 말 800필을 보 해 통일됐다. 이제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수나
냈다. 이때 북위의 해상봉쇄와 공격을 피하려 라와 만리장성을 넘을 수밖에 없는 경제적 숙
면 서해를 종단하거나, 서해 북부 해안을 근해 명을 가진 ‘튀르크 1제국’, 그리고 고구려 사이
항해하다가 양자강 하류에 상륙하는 방법밖 에 경쟁과 충돌은 불가피했다. 결국 598년, 고
에 없다. 뗏목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여러 차 구려의 영양왕은 선제공격을 취해 말갈병(또는
례 항해를 경험해 본 필자조차도 대량의 말을 거란병) 1만을 거느리고 요서 지방을 공격했다.
실은 대선단들이 무려 1,200km 이상의 거리를 『수서』의 일부 기록은 고구려가 해양 방어시
항해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만 하다. 설을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수군을 동원한 것
이다. 이어 수나라의 문제가 30만 명의 수륙군
해륙 양면전인 동아시아 국제대전 을 구성하여 반격했으나, 육군은 역병이 창궐
고구려의 해양 활동과 중요성은 고구려와 해 요하 전선을 넘지 못했다. 한편 래호아가 지
수나라, 당나라 간에 벌어진 대전쟁에서 본격 휘하는 6,000명의 산동 수군은 평양성을 향해
적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이 전쟁을 1994년도 출항했지만, 폭풍우를 만나 배들이 표몰됐고
에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렇게 주장했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수서』). 하지만 필자는
다. 즉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무역권을 둘러싸 그 시기의 기상 조건들을 분석한 후에 수군은
고 벌어진 국제질서의 재편전이며, 한륙도와 장산군도 등에 구축한 촘촘한 해양 방어체제
중국 일본 몽골, 심지어는 알타이지역과 중앙 에 막히고, 또한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받았을
아시아 등 유라시아 세계의 동쪽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발표했다.(윤명철, 『고구려 해성연구』)
국가와 종족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국제 이어 등장한 양제(煬帝)는 즉위하자마자 전쟁
대전이다. 또한 전쟁의 목적과 진행 과정, 결과 준비에 들어갔다. 중국의 지정학적인 숙명대로
등을 보면 ‘고수 전쟁’ ‘고당 전쟁’ 소위 ‘삼국 수양제는 수순에 따라 남쪽의 유구(대만)를 점
통일전쟁’은 별개의 전쟁이 아니라 3단계로 이 령했고, 임읍(북베트남)을 공격했으며, 적토국(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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