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6 - 대한사랑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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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1932)과 혼인하였다. 이후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영구(榮

            求)라는 이명이 있다. 이은숙 선생은 당시까지는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여성이 그러
            하듯 집 안에 머물면서 조신하게 지낸 대갓집 새댁이었다.

              하지만 이회영과의 결혼으로 이은숙의 인생은 시대의 흐름에 의해 변화되었다. 시집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독립운동을 위해 온 집안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남편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형제들의 결단이 있었지만, 부인들의 묵시적인 동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0개월 된 딸이 있던 이은숙 선생은 어린 자녀와 함께 서울을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대부집 여인에서 온갖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

            가야 하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살아가는 삶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동안 이은숙 선생은 이회영 선생의 부인으로 거론될 뿐, 주체적인 독립운동가로
            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이 그러하듯 우리 역사는 여성을 온전한 인

            격체로 바라보지 않았다. 독립운동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에 머문다고 간주했던 탓이 컸다. 나라를 잃고 일제로부터 억압

            받는 상황에 부닥친 것은 남녀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피해가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남녀 구별 없이 저마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는 제
            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고 특히나 드러나지 않게 헌신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대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서간도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다

              만주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등 독

            립운동기지 개척에 일조하였다. 이들은 우선 안정적인 사회·경제적 틀을 조직하고자 하
            였다. 또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과정

            은 엄청난 고난의 연속이었다. 특히 중국 현지 주민과 관헌의 따가운 눈총과 배척은 이
            루 말할 수 없었다.

              중국 현지 주민들은 회의를 열어 한인들에게 토지나 가옥의 매매를 일절 거부하고,

            한인들의 가옥 건축이나 학교 시설도 금지하며, 한인과의 교제도 금지한다고 결의하였
            다. 이회영 일가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중국 정부와 교섭을 벌여 주민들과

            의 갈등 해결에 힘썼다. 그래서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세우고, 교육기관으로 신흥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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