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7 - 대한사랑 11월호
P. 67

2025. 11

                       습소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는 뒤의 신흥무관학교가 되었다.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1917년 6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의 혼사로 귀국하였다. 1912년부터 이미 국내에 있던

                       이회영이 1919년 베이징으로 가자, 이은숙도 2월 베이징으로 이동하였다. 임신한 몸으
                       로 남매를 돌보며, 독립운동가를 보필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1년에 수십 차례 거처를

                       옮겨 다닌 적도 있었다. 1925년에는 손녀 둘과 세 살 아들을 병으로 잃는 고통을 겪기

                       도 했다. 이회영 집안 자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굶거나 아파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
                       다. 결국 이은숙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생활비 마련을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 귀국해서도 그의 독립운동 자금지원은 계속되었다.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마
                       련한 자금을 이회영에게 보내기도 했다. 1926년에는 자금 마련 일이 경찰에 탐지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28년부터 경성부 병목정(竝木町)에 있는 고무공장(경성직뉴공장)에

                       서 일하였다. 퇴근 후에는 바느질로 장충동 일대 기생의 옷을 만들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아껴 베이징으로 보냈다. 1930년 들어 경찰의 단속으로 바느질마저 여의치 않자,

                       남의 집의 가사를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순국 이후

                        1932년 11월 이은숙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바로 이회영이 순국한
                       것이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이회영은 주만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할 목적으로 대련으로

                       향하던 도중 일제 경찰에 붙잡히게 되었고,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고 말았다. 당시

                       이은숙의 나이 44살이었다.
                        이은숙은 이회영이 순국하자, 남아있는 가족을 위해 더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가족

                       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처럼 독립운동하다가 붙잡
                       혀 투옥된 아들 이규창의 옥바라지에도 헌신적이었다. 이렇듯 이은숙은 마음속 깊이

                       이회영의 뜻을 새기며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큰 버팀목이 되고자 하였다. 그것이 바로

                       가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이은숙 선생이 걸었던 길이다. 아쉽게도 이회영 선생과 이
                       은숙 선생은 부부이지만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 시절은 두 위대한 부부의 모습

                       조차 함께 담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67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