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0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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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지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 의 활약 앞에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
이다. 갈리아 서북부를 휩쓴 민중반란인 바
그러나 아에티우스가 훈족에게로 가우데 반란도 아에티우스는 해결하
간 사이 요한네스의 부하들이 배반하 였다. ‘바가우데’는 갈리아의 도망노
여 요한네스는 처형당하고 말았다. 심 예, 탈주병, 빈농 등으로 이루어진 집
지어는 아에티우스의 부친도 처형되었 단으로서 로마의 지주계급 뿐 아니라
는데, 이 사실도 모른 채 그는 훈족 부 로마제국의 지배에 저항하였는데, 이
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들어와 자신 반란의 진압에도 훈족 기병대의 도움
이 반란군의 수괴가 되어 있음을 깨달 이 결정적이었다.
았다. 토벌대상이 되었던 그는 발렌티
아누스의 모친이었던 갈라 플라키디 훈족과 로마제국의 전쟁
아 측과 담판을 벌여 훈족을 돌려보내 물론 로마제국과 훈제국의 관계가
는 대신, 자신은 갈리아 사령관직을 얻 계속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동
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한 역사가 로마 제국과는 탈주자 송환문제로 여
에 의하면, 아에티우스가 데리고 온 훈 러 번에 걸쳐 충돌이 빚어졌다. 435년
족 병력은 무려 6만 명에 달했다고 한 에는 동로마는 훈족의 탈주자들을 받
다. 이러한 훈 부대 때문에 갈라 플라 아들이지 않는다는 것과 몸값을 지불
키디아는 아에티우스의 요구를 들어 하지 않고 로마로 도망쳐오는 로마인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아 포로들을 소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에티우스는 서로마제국의 정치를 좌 훈족은 로마의 시장에서 로마인들과
우하는 실권자가 되었다. 동등한 권리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
아에티우스는 서로마제국의 동맹 는 권리도 보장받았다. 여기에 더해 동
훈족의 도움을 받아 서로마제국의 적 로마는 평화조약이 지켜지는 대가로
대 세력들을 하나씩 공격해갔다. 라인 700 리브라의 황금을 매년 바치기로
강 중류의 상부 벨기카를 침공한 부르 하였다. 그러나 동로마는 약속한 공납
군트족은 아예 나라가 없어져버렸다. 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고 훈족 탈주
오늘날의 프랑스 땅 서남부에 정착하 자들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441년 훈
였던 서고트족은 남프랑스 쪽으로 영 족의 아틸라 왕이 동로마 제국으로 쳐
토를 확대하려고 하였는데, 역시 훈족 들어간 것은 이러한 약속 위반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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