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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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징이었다. 발칸반도의 많은 도시와 지 않지만 하나의 조항은 역사가 프리
요새들이 함락되었다. 동로마는 공납 스쿠스에 의해 전해져 온다. 신기두눔,
을 배로 올려줄 것을 약속하고 평화를 즉 오늘날의 세르비아 수도인 베오그
얻었지만, 또 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아 라드로부터 불가리아 북부의 노바에
443년에도 훈의 침략을 받았다. 공납 까지 거리상으로는 550km가 넘는 다
액수와 포로의 몸값을 각각 50퍼센트 뉴브 강 남쪽 지대를 따라 150km 정
인상하고 싸움이 종결되었다. 도 폭의 무인지대를 만든다는 조항이
447년에도 훈족의 공격이 있었는 었다. 실제로 이 완충지대는 만들어졌
데, 역시 동로마제국의 약속 불이행 때 다. 물론 그곳에서 몰래 농사를 짓는
문이다. 447년의 원정은 훈족 뿐 아니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다음해 훈제국
라 훈족에 복속된 게피다이족, 고트족 의 아틸라 본영을 향해 다뉴브 강 남
등 여러 족속들이 동원되었다. 당시 훈 쪽의 이 지대를 지나갔던 프리스쿠스
족의 공격으로 함락된 도시만 백 개가 에 의하면 중간의 나이수스 같은 큰
넘었다고 한다. 아틸라의 군대는 이번 도시에도 주민이 없었다고 한다.
에는 그리스 본토 깊숙한 곳까지 내려 아틸라는 451년에는 서로마 쪽으로
가 약탈을 하였다. 동로마제국은 448 방향을 돌려 50만 명에 달하는 대군
년 훈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는 을 이끌고 갈리아 원정을 하였다. 이제
데, 이 조약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 까지 서로마제국과 동맹관계를 유지
하던 아틸라 왕이 서로마제국의 갈리
아로 원정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이 여러 가지 설명을 내어놓
고 있다. 갈라 플라키디아의 딸 호노리
아 공주가 아틸라에게 청혼을 하자 그
것을 구실로 서로마제국 영토의 절반
을 요구하며 원정에 나섰다는 이야기
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유력한 설명은
당시 프랑크족의 일부가 훈제국의 지
배로부터 이탈하자 그 반발세력을 징
뿔이 달린 것으로 묘사된 아틸라 왕(16세기 메달) 벌하기 위해 갈리아로 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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