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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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여 만들어졌다. 진시황은 전국칠웅 왕들
을 정복·통일한 자신을 최고통치자로서 왕 중
의 왕, 즉 ‘황제’라 하였고, 황제로서 자신을 황
천상제의 아들, 즉 천자라 여겼다. 이런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는 황제국·천자국이다. 결국 ‘칭
제’란 황제가 되고 천자국이 되는 것이다. 진나
라 이후 한나라로부터 청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대 군주들은 대부분 자신을 ‘황제’라 칭하였
다. 그리고 주변국을 제후국으로 삼아 종속시
키며 화이 관념을 실천하였다. 조선 사회 역시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대례의궤(大禮儀軌)』 ⓒ서울대학교 규장각
칭제에 대한 논의는 비록 그 의도는 달랐지
만, 대한제국 이전에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조
하였다. 『대례의궤(大禮儀軌)』에는 황제의 환구 선의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칭제 여론이 본격
단 천제를 비롯하여 대한제국 탄생 과정의 다 화된 것은 고종이 아관파천 후 경운궁으로 돌
양한 의례를 담고 있다. 아온 1897년 5월부터이다. 청일전쟁 이후 청
의 간섭이 줄어들고,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의
칭제건원(稱帝乾元)과 새 연호(年號), 광무(光武) 손아귀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고, 고종이 환
고종의 다음 행보는 자신을 왕이 아닌 ‘황제’ 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를 꿈꾸는 가운데
로 칭하고 황제를 상징하는 독자적인 연호 제 민간에서는 독립과 자주를 지향한 국권 운동
정으로 이어졌다. 칭제(稱帝)에서 ‘제(帝)’는 천자· 도 시작된 때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황제를 의미한다. 것이었는지, 고종의 칭제와 황제 등극을 주장
‘황제(皇帝)’라는 말은 중국 진(秦)나라 진시황 하는 목소리가 5월부터 여기저기서 터졌다. 여
이 처음 사용하였다. 진왕이 전국칠웅을 통일 러 상소는 저마다의 논리로 칭제와 황제 등극
한 후 기존의 왕과는 다른 더 존귀한 호칭이 필 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칭
요하다고 여겨 새로이 만든 것이 바로 ‘황제’라 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는 존호(尊號)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의하 환구단 건축 문제가 제기되고 칭제에 대한
면 ‘황제’라는 말은 삼황의 하나인 ‘태황(泰皇)’ 상소가 증가하는 가운데, 고종은 환구단 관련
의 ‘황(皇)’ 자와 상고시대의 ‘제(帝)’라는 호칭을 어떤 일을 암중시키고 있었다. 8월 12일,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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