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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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일대인데, 지난날 영은문을 거쳐 한양으 환구단은 3층으로, 바닥은 벽돌로 마감하였
로 들어오던 명나라 사신들이 머물던 남별궁이 고, 1층 주변은 돌로 담을 둘렀으며, 사방에는
있던 곳이다. 이 자리에 환구단을 만드는 것은 홍살문을 세웠는데, 남문은 문이 셋이다. 한 달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드 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1차 조성한 환구단은
러내는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단순한 제천단의 성격을 띤다.
비록 황궁우 등을 갖춘 온전한 형태인 것은 이런 환구단은 이후 황궁우 건축, 환구단 중
아니었지만, 1,000여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10 수 등을 거쳐 약 7년 만에 조성을 마쳤다. 그러
월 2일에 착공한 환구단 공사는 한 달도 안 되 나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1913년 일제
어 1차 완성되었다. 환구단은 하늘을 상징하 에 의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총독부 직영
는 3층의 원단이며,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의 조선철도호텔이 세워졌다. 이후 1967년에는
담장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 천원지방 사상이 조선호텔이 새로 지어졌다.
반영되었다.
당시 신문이 보도한 1897년 10월 남별궁 서 어보(御寶) 제작
쪽에 만든 초기 환구단 모습은 이러하였다. 국새는 국가를 상징하는 국가 최고 통치자
의 인장이다. 1897년 10월 3일에 고종이 칭제
이전 남별궁 터전에 단을 모았는데 이름은 환구 를 허락하고 환구단이 건축되는 가운데, 10월
단(圜丘壇)이라고도 하고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는 4일에는 황제 즉위식 때 올릴 어보(御寶), 제왕
데, 역군과 장색(匠色)[공인] 1000여 명이 한 달 을 상징하는 인장을 만들 준비를 하였다.
이 못되어 이 단을 거의 다 건축하였는데, 단이 3 도장은 ‘새(璽)’, ‘보(寶)’, ‘인(印)’, ‘장(章)’ 등 다
층이다. 맨 밑층은 장광이 영척으로 144 척 가량 양하게 지칭된다. 그러나 도장이라고 해서 모
인데 둥글게 돌로 쌓아 석자 길이 높이를 쌓았고, 두가 같은 도장인 것은 아니다. 동북아에서는
제 2층은 장광이 72척인데 밑층과 같이 석자 높 지난날 사대질서에 따라 황제·천자를 상징하
이를 쌓았고, 맨 위층은 장광이 36척인데 석자 는 도장을 ‘새’·‘보’라 하고, 신하·제후들이 쓰
높이를 돌로 둥글게 싸서 올렸고, 바닥에는 모두 는 도장을 ‘인’이나 ‘장’이라 하여 차별화하였
벽돌을 깔고 맨 밑층 가로는 둥글게 석축을 모으 다. 이런 경향은 특히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
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 동서남북으로 홍 고 전국새(傳國璽)를 제작하면서부터였다.
살문을 하여 세웠는데 남문은 문이 셋이다. 국새는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 문서에 사용
(<독립신문>, 1897.10.12.) 하였는데, 조선시대의 경우 국새는 대부분 명·
청의 황제들에 의해 책봉과 더불어 받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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