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대한사랑 5월호
P. 52
제궁촌 충렬당 앞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신도 비문은 좌의정 권상우가 찬하고, 우의정
김구가 글씨를 썼으며, 영의정 민진원이 전서를 썼다. 1798년(정조 22)에 고려 예의판서
김주에게 중정공(忠貞公)의 시호를 내리면서 좌승지 이익운(李益運)으로 하여금 별묘인 내
격묘에서 농암의 시호를 언시(宣謚)하고 대왕께서 직접 지은 어의제문(御의祭文)으로 치제
하게 하고 부조지전(不朝之典)을 명하였다.
교지문은 “高麗正順大夫禮儀判書金澍 贈謚忠貞公者 嘉慶 三年(1798) 月 日 事君盡
節曰忠(임금을 섬기되 절의를 다하였으니 충이요) 淸白自守曰貞(정렴함으로서 스스로 절조를 지켰으니
정이다)” 라고 쓰여 있는데, 아쉽게도 70년대에 분실되고 지금은 사진만 남아있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고려말에 세운 경현사(景賢詞)가 있는데, 이곳은 고려 말 충신
72현을 모신 곳으로 순절반(殉節班)과 정절반(貞節班)이 있는데, 정절반은 비록 목숨은 바
치지 않았으나 지조를 지켜 그 신절(臣節)을 다한 충신을 모시는 곳이며, 순절반은 순국
한 충신을 모신 곳인데 순절반의 주벽은 포은 정몽주요, 정절반의 주벽은 농암 김주였
다.
“조선의 인재 절반이 영남에 있고 영남의 인재 절반이 선산에 있다”(택리지)고 했듯이
선산 지역은 예로부터 인재의 고장이다.
선산인 농암은 14세기 말 조선의 땅을 밟지 않고 명나라로 되돌아 갔을 때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서(尙書) 녹봉을 받은 사실이 전해진 후로 16세기 말 조선 사림에서는 농
암이 중원(中原)에서 절조를 보인 사실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17세기에는 농암의 순국충절((殉國忠節)과 질의를 부각하고, 삼인(三仁)으로 확고히 하
였으며, 충절이 사육신과 동일하다고 하고,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이 인(仁)을 이룬 사
람으로 추종하였다. 18세기에는 농암 김주를 정몽주, 길재와 함께 삼현(三賢)으로 높이
고, 인의(仁義)를 수행한 충신으로 추존한 후 시호를 충정공(忠貞公)이라 하였다.
몸은 이국에 묻혔어도 혼은 내 나라에 묻힌 농암 김주의 무덤은 바로 의관묘(依冠墓)
다. 선생의 유훈(자신의 행적과 이름을 결코 드러내지 말라)은 남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는데 연
연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군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현손인 응기(應萁)도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부.조.증조까지만 밝히고 고조인 농암의 사적은 전혀 없다. 이처
럼 그의 충절과 유훈을 지키며 살아온 선조들의 정신에서 충과 효의 도리를 새삼 깨닫
게 된다.
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