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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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에 두 차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사만 왕조는 본래 압바스 왕조하의 이슬람 칼리프

                       제국에 속한 제후국이었다가 압바스 왕조의 세력이 약해지자 892년 독립하였다. 사만
                       왕조는 이란 동부의 호라산뿐 아니라 아무다리야강 너머의 트란스옥시아나를 지배하

                       고 있었는데,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다. 당시 사만 왕조의 수도가 우즈베키스

                       탄에 있는 부하라였다.
                        전쟁은 사만 왕조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한쪽이 카라한을 싸움에 끌어들이

                       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싸움의 결과 투르크계인 카라한 칸국이 이란계인 사만 왕조
                       를 무너뜨리고(999년) 사만 왕조가 지배하던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

                       써 카라한은 파미르 고원 동서 초원과 오아시스 지역에 걸친 큰 세력을 구축하였다. 카

                       라한은 1006년에는 불교 국가인 호탄을 정복하여 타림분지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였
                       다.

                        사만 왕조는 초기부터 투르크 출신 노예들을 병사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들은 아랍
                       어로 ‘굴람’이라 불렸는데, ‘노예’라는 뜻이다. 유목민인 투르크인들이 기마에도 능하고

                       용감하여 병사로서는 꽤 유용하였다. 그리하여 사만 왕조 군주들의 총애를 받아 군대

                       에서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일부는 장군이 되거나 지방 총독 자리까지 오르
                       기도 하였다. 사만 왕조 말기에 등장한 알프 테긴이라는 인물은 굴람 출신으로서 호라

                       산 지방의 방어를 책임지는 군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사만 왕조 내부의 분란을 이용하

                       여 왕조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가즈나를 점령하고 독립적이 세력이 되었다. 그의 후손
                       들이 세운 왕조는 아프가니스탄에 위치한 이 도시 이름을 따서 ‘가즈나 왕조’라고 불린

                       다. 사만 왕조의 멸망 후 가즈나 왕조는 같은 투르크계인 카라한 칸국과 협상을 하여

                       국경선을 아무다리야로 정하고  그 남쪽 지역을 보장받았다.
                        카라한 칸국은 말기에 내부 분열로 인해 동서 카라한으로 나뉘었다. 예전의 돌궐 제

                       국과 같은 길을 간 것이다. 11세기 말 같은 투르크계인 셀주크 제국이 힘을 키우면서,
                       카라한 왕조는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서부 지역을 상실하고 12세기에 들어서는 거란계

                       국가인 카라 키타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칭기스칸 때 카라 키타이가 멸망하면

                       서 카라한 왕조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셀주크 제국

                        오늘날의 튀르키예는 셀주크 가문이 세운 나라로부터 기원하였다. 셀주크족은 돌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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