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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중국 고대 정사(25사)에서 발견한 비류백제의 흔적과 실체(?)

[출처] 수구리의 우리 고대사(고조선의 역사와 영토) : 사기등 중국 고대문헌의 지리적인 고찰
--> https://tnrnfle.tistory.com/39

 

■【후한서 동이열전와 정사삼국지 위서동이전, 진서 동이열전】 부여에서

(위)구태의 부여는 비류백제이고, 비류백제 위치는 예맥=예=동예가 있었던 하북성 창주시

 

-. 『후한서 동이열전과 정사삼국지 위서동이전』 부여에는

    졸본부여 동명왕이 부여선조로 기록되어 있고, 공손도가 (일족의) 딸를 부여왕 (위)구태에게 시집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 『주서 이역열전 백제』에는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백제)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   『북사 동이열전 백제』에는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의 옛땅에 백제를 건국했는데 공손도가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 『정사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진서 동이열전』 부여에

    부여국 가운데에 옛 예성이 있는데 예맥의 성이라 했다

-. 『한서 무제기』에서 예(동예=예맥)의 임금(예군, 濊君) 남여가 항복하여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사마천사기 평준서』에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지간(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소란해 졌다고 했으니

      연제지간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이니, 예=동예=예맥의 위치는 하북성 중동부인 지금의 창주시 지역이다

 

-. 삼국사기 일설인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 【우태를 주몽의 다른 이름인 아명으로 본다

    주몽과 우태를 동일인으로 보는 이유는

    주몽은 우발수에서 잉태하여(우태) 태어났으며 (동)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니

    우태의 설명과 주몽의 설명이 같기 때문이다(비슷하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①후한서 동이열전과 정사삼국지 위서동이전의 부여가 주서 이역열전과 북사 동이열전의 백제, 비류백제다

② 비류백제 나라 가운데 예맥(=예=동예)의 성이 있으니 하북성 창주시에 있었던 예(예맥)에 비류백제가 있었다

    (비류백제가 미추홀인 바닷가에 건국 했는데, 창주시도 바닷가)

 

■ 하북성 창주시 비류백제의 전라도 나주(호남지역) 이동과 일본열도 진출

 

1) 비류백제 의려왕은 백제 8대 고이왕

  백제 제8대 고이왕의 성이 우태의 우씨이고, 사망년도가 AD 286년으로,

    진서 동이열전 부여에 나오는 의려왕의 사망년도와 동일하기에  고이왕이 의려왕으로 추정된다

2) 반란을 일으킨 내신좌평 우복(優福)은 비류백제 의라왕

    삼국사기에 백제 11대 왕 비류왕 24년(327)에

    내신좌평 우복(優福)이 북한성에서 반란했지만 비류왕이 토벌했다고 했는데

    한산 북쪽이 백제북쪽이고 우복(優福)이 우씨이니 비류백제 왕인 의라왕으로 추정된다

    (서진은 316년에 멸망했다.

     진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의라왕은 서진이후에도 부여인 비류백제의 왕이었다)

3) 비류백제는 하북성 창주시에서 전라도 나주(호남지역), 일본열도로 이동했다

    비류백제는 하북성 창주시의 해양세력이었습니다

    327년 백제 비류왕의 공격을 받은 비류백제 의라왕(우복)은 해양세력을 거느리고,

    하북성 창주시에서 서해를 건너 살기 좋은 전라도 나주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일본열도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4) 전라도천년사는 전라도역사와 영토를 일본에게 팔아 먹는 역사매국 대하 역사소설이다

  호남지역의 4세기 중반이후 고고학적 물질문화 변화는

  하북성 창주시 비류백제 의라왕의 전라도 나주(호남지역) 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라도 천년사』

   야마토왜의 일본열도 정복 과정인

  【일본서기 주어를 백제로 바꾸어】  백제의 호남지역 진출 내용으로 기술하여

  전라도 역사와 영토를 일본에게 팔아먹는 역사매국 대하 역사소설을 쓴 것이다

 

5) 자치통감에 나타나는 AD 346년의 부여(녹산부여=서부여)는 요서백제다

    요서지역인 석가장시 부근에 녹산이 있었으니,

    자치통감에 나오는 서부여로 알려진 (녹산)부여가 요서백제로 추정된다

    근거는 (녹산)부여 왕은 여현餘玄이었는데 전연의 모용황에게 346년 망했다

    346년 사망한 백제 12대 왕인 계왕이 (녹산)부여 왕인 여현(餘玄)으로 추정된다

※주) 녹산(백록산,白鹿山)은 온조왕이 건국한 하북위례성 부근(요서 지역) 으로 추정되는데.. 

       1) 위서지형지 영주 건덕군(전한의 우북평군)의 석성현에 (백)녹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2) 삼국사기에 비류와 온조가 (보정시 지역의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패수 대수를 건넜다는 내용과

           온조왕이 백제 동쪽에 낙랑군이 있고 북쪽에 말갈(오환) 있다고 했으니,

           석가장시 지역의 요서군(우북평군) 부근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 


■ 삼한의 지리적인 위치 비정의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 열국 지도(BC 1세기의 고구려 부여 마한 등 위치)"에서 확인하면 된다

--> https://blog.naver.com/tnrnfle/222488545290

    

1) 후한서와 정사삼국지에는 백제와 신라가 없고, 한과 예가 있으니

   신라는 진한이고, 비류백제는 위구태의 부여, 온조백제는 한 또는 마한일 확률이 매우 높다

 (AD 244년 관구검이 환도성을 파괴할때 역사서를 갖고 갔을 것이고,

  이것을 기준으로 위만조선시대의 부여, 예=동예, 삼한의 지리와 풍습을 설명했을 것이다)

 

2) 정사삼국지 위서동이전의 예濊조에 지금의 조선(今朝鮮)이 나오는데,

    중국 삼국시대(오 촉 위 AD 220~280)에는 낙랑군이 있었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으니

   지금의 조선(今朝鮮)에서 조선은 위만조선이고 지금은 위만조선 시대인 BC 194 ~ 108년으로 보이니,

   위만조선 시대의 고조선 열국의 위치와 풍습을 설명한 것이다

 

3) 고조선인 북부여와 졸본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는 한나라와 전쟁이 했으니,

    후한서와 정사삼국지에 고구려를 강제로 끼워 넣을 수 밖에 없었는 것으로 판단되며,

    한나라가 신라나 백제와는 치열한 전쟁가 없었기에 백제는 마한이나 한,

    신라는 진한으로 표현하여도 문제가 없었기에 바꾸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4) 부여에 대해

   (1)해모수의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가 동명왕의 졸본부여, 동명왕의 졸본부여를 이어 받은 나라가 고구려다

   (2) 동명왕을 피해 북부여 동쪽으로 이동한 나라가 해부루 - 금와왕 - 대소왕의 동부여,

   (3) 동부여의 대소왕이 죽자 대소 동생이 갈사국으로 이동하여 갈사부여가 세웠다

 

5) 후한서에 AD 57에 등장하는 부여는

    (1) 북부여나 졸본부여가 될 수 없고 (북부여 - 졸본부여 - 고구려로 이어졌으니..)

    (2) 동부여는 AD 22년에 망해서 고구려 연나부가 되었으니 동부여도 후한서의 부여가 될 수 없다

    (3) 북부여와 동부여 남쪽에 졸본부여/고구려가 있었고 고구려는 사방 2천리 영토 였으니

        갈사부여 위치는 고구려 동북쪽 2천여리정도에 있었고

        갈사부여는 AD 68년에 고구려에게 항복했으니 갈사부여도 후한서의 부여가 될 수 없다

 

6)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부여를 건국한 사람이

    색리국(고리국) 출신의 동명왕으로 나오니, 후한서와 정사삼국지의 부여는 동명왕인 졸본부여의 후손일 수 밖에 없으니

    졸본부여왕의 외손자(동명왕의 외 고손자)가 비류와 온조다

 

    따라서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의 부여는 비류백제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7) AD 30년에 동옥저에 설치했던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되었고, AD 37년에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켰고,

     AD 56년에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벌하니, 동옥저 부근의 갈사부여가 AD 68년에 고구려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AD 247년 동옥저 지역인 진황도시 지역에 동천왕이 평양성을 쌓고 수도를 옮길 수 있게 되었다

 

​     ※주)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조에 당고종의 아들 장회태자가 주석을 달았다는데,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당고종과 즉천무후의 아들인 장회태자가 주석하기를,

            【그 산(개마대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고 했으니,

            예(동예)인 창주시 북동쪽에 동옥저가 있으니 평양성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다

 

8) 졸본부여를 세운 색리국(고리국) 출신의 동명왕을 선비족으로 본다

   관구검의 관(毌)이 모(母)의 오기로 의심되고, 전연/후연의 모용씨를 동명왕과 비류의 후손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비류백제가 망하자 비류백제 출신의 모용씨가 요서백제 왕이 되었고

   모용씨 후손인 동성왕(모대)이 백제 왕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9) 전연과 후연, 북연을 요서백제로 보는 근거는

     (1) 양직공도에 서진(265∼316) 말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고 했는데...

          전연(337∼370) 모용외가 서진 말 사람이고 평주자사 였고,

          아들 모용황이 극성에 도읍하여 337년에 전연을 세웠다

     (2) 그런데 진서지리지 평주에 보면 평주는 창려, 요동,현토, 낙랑, 대방 5군인데, 모용외가 평주자사가 되고,

           손자인 모용준이 계성으로 전연의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전연의 도성 계(계성)은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이니 요서군 부근이고 평주도 요서군 부근이다

           따라서 서진 말기에 요서를 차지한 것은 모용외니, 전연이 요서 백제일 수 있다

      (3) 서진 말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내용은

           미천왕 12년(AD 311)에 고구려가 서안평(요동군 치소인 양평 서쪽)을 차지한 기사가 있다

 

10) 위서(魏書)는 북제(550~577)의 위수가 편찬한 사서인데..  『동이열전 백제』에

      『북연이 국운이 다하여 남은 무리가 급하게 (고구려)로 도망간 이후로 고구려가 강성해졌다』는 내용이

      AD 472년에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게 보낸 친서(表)에 기록되어 있다(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1) 따라서 북연의 풍씨가(북연 왕이 고운-풍발-풍홍) 백제로부터 고구려로 도망가서 고구려가 강성해졌다는 내용이니

          북연은 백제의 담로국이었고, 북연의 전신인 전연과 후연도 백제의 담로국으로 봐야 한다

     (2) 친서(表)에는 개로왕이 여례를 불사후에 임명하고, 장무를 대방태수에 직접 임명했다는 내용도 있다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 弗斯侯 長史 餘禮, 龍驤將軍 帶方太守 司馬 張茂.)

          따라서 대방군도 백제의 담로국으로 보인다(불사국도 담로국)

     (3) 북연이였던 풍씨일족의 군사들이 보금자리를 그리워하고, 낙랑의 여러 고을들이 고향을 그리워한다라고

           개로왕이 표현했으니 보금자리나 고향은 백제로 볼 수 있다(且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백제영토였던 북연과 낙랑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표현으로 보인다

 

11) 삼국사기의 비류백제인 바닷가 미추홀은 예맥=예=동예인 하북성 동부 창주시로 보인다

      (1)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진서 동이열전의 부여에서

            비류백제로 추정되는 의라왕 부여에는 나라 가운데 옛날 예의 성이 있는데,

            본래 예맥의 성이다는 내용이 있다

      (2) 『한서 무제기』에서 예(예맥)의 임금(예군, 濊君) 남여가 항복하여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사마천사기 평준서』에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지간(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소란해 졌다고 했으니

           연제지간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이니, 예=동예=예맥의 위치는 하북성 중동부인 지금의 창주시 지역이다

 

     ☞ 『삼국지 위서동이전 및 진서 동이열전의 부여 내용』

           그 왕(부여 왕)의 인장에는 「예왕의 인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 가운데에 옛 예의 성이 있으니,

           그것은 본래 예맥의 성이다.(其王印文稱「穢王之印」. 國中有古穢城, 本穢貃之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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